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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Jun 29. 2023

난 울화통! 넌 성장통!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

"아들~ 이 게임은 돌 다섯 개가 한 줄에 있어야 이기는 게임이야."

"아들. 이건 한 명씩 순서를 바꿔가면서 돌을 놓는 거야."

"아들! 그게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다섯 개가 한 줄에 있어야..."

"아ㄷ.... 아휴..." 


6살 아들에게 오목을 가르치다 그만두었다. 어디서 알았는지 오목을 알아와선 아빠랑 꼭 한 게임해야겠다고 했던 아들이다. 형이랑 오목 게임을 해서 이겼다며 나를 찾아왔는데... 이게 뭔가... 게임 규칙을 모른다.


금방 배우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설명하는데 이런... 알 의욕도 없다. 앞서버린 기특한 마음에 내 의욕만 더 앞섰고 이내 답답해진 가슴에서 한숨이 가늘고 길게 새어나왔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세상 어려운 25만 가지 중 하나인데 그걸 하려고 했다니. 나도 참 용감하다. 게다가 상대는 아직 어린 아이. 그 어려운 것을 최고 난이도로 해내려고 했다니 생각할수록 용기가 가상할 뿐이다.


직장에서의 배움과 가르침        


부득이하게도 직장에서는 그 가상한 용기를 내야만 한다. 직원들 상호간에 정해진 배움의 코스는 없지만 일의 진행을 위해선 자연스레 전달되고 숙지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직장에서 모르는 것을 배우는 건 부담스럽지만 나름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면, 차츰 일은 수월해지고 마음은 편해진다. 그런 만큼 상대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익숙해지게 돕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끼곤 한다.


그러고 보면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직장인의 일상이다. 주고받는 정보와 지식에는 회의 시간과 장소부터 업무 스킬까지 다양하다. 이런 일상 속에서 오늘도 업무는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서로 돕고 사는 사회는 그래서 보람 있다.


그런데 이 보람을 마주하기까지 쉽지 않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선배의 입장에서는 보통 울화통이라고 칭하는 고통을 통해 비통함을 겪는 것이고, 후배의 입장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성장통으로 인해 진통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간에 어느덧 생겨난 불통이 불똥이 되어 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선배는 올챙이적 기억을 잃었거나 미화시킨 덕에 후배가 답답하고, 후배는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아무리해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탓에 답답하다. 선배는 일의 진행을 위해 또 다시 자신이 나서서 알려 줘야하는 건 아닌지 눈치껏 넘겨보고, 후배는 그런 선배의 눈치를 본다. 선배는 여유가 없고 후배는 경험이 없는 탓이다.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 '시간'인데 이를 할애할 여유가 없다. 직장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한가로움의 또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선 믿고 맡기는 결단과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한데 그게 그렇게나 어렵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선

             

▲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Pixabay


누군가의 성장이 더딜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우를 범하곤 한다. 하나는 보고 배우라며 대신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지고 될 때까지 해보라며 손을 놔버리는 것이다.


일취월장하던 사람이 잠시 정체기를 거치면 이내 도와주는 선배가 있다. 부럽다. 일을 분담해주거나 심지어 본인의 시간을 투입해 해결해주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돈독한 관계는 정체기를 딛고 한 단계 성장해야 할 사람에게 한계를 짓게 만들고, 역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어야 할 사람에게 뒷일을 처리하게 만든다.


한두 번이야 어떻겠나 싶지만 심한 경우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동일한 마감 시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이유다. 사안의 시급함과 중대함엔 공감하지만 책임감에선 경중이 나눠지기 때문이다.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시점에 책임감은 생기기 힘들다.


반면에 방임의 자세로 지켜보는 선배도 있다. 믿고 맡긴다기보다는 이만큼 가르쳤으면 할 줄 알아야지라는 자세로 팔짱을 끼고 지켜본다. 이 경우 배우는 사람은 혼란스럽다. 다 배운 것 같긴 한데 익숙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잘 못한다고 지적까지 받는다. 결국 불만이 쌓인다.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일을 시킨다는 불평이 자연스레 피어난다. 당연하게도 책임감 대신 부담감만 가진 채 일을 그르치거나 끝내지 못한다.


아무리 가르쳐도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만하고 싶다.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거침없이 샘솟는다. 그런데 그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면 그와 내겐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그와 내가 한 발 나아가든 한 단계 올라서든, 지금의 자리를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조직에선 내가 비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채워주어야 하고 동시에 내가 자리를 비워줘야만 그 사람이 나아갈 곳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이끌고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여유가 필요하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부를 부릴 필요가 있다. 일부러 못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성장한다. 사람마다 그 속도와 밀도가 다를 뿐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열두 마디를 더 하게 되더라도 기다려주는 미덕이 한 사람을 성장시킨다.


얼마 전 10살 딸아이에게 체스를 졌다. 방심한 것도 있지만 어느새 상대방의 실수를 알아채고 결정타를 날리는 수준이 되었다. 체스를 가르친 지 2년이 지나서야 얻은 성과다. 지고도 뿌듯한 신기한 경험은 보람이지 싶다.


요즘은 막내와 제대로 된 오목을 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가 될지 짐작하긴 힘들지만 머지않아 가능하리라 본다. 조금씩 가르치며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사람은 언젠가 성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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