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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Dec 07. 2023

실패가 무서워지지 않는 마법의 말

인생의 보호필름



아내가 고택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지역 명소를 탐방하며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고추장 만들기, 청사초롱 만들기 같은 다채로운 체험도 할 수 있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이었다.


참가 1주일 전, 행사 주최 측에서 가훈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왔다. 프로그램 중에 붓글씨로 가훈을 써보는 체험이 있는데, 사전에 가훈을 알려주면 붓글씨 명장께서 직접 적은 가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별 고민 없이 평소 가족들에게 강조해왔던 "후회 없이 살자!"로 결정하려는데 왠지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게 없을까? 뭔가 독특하고 살짝 비껴나간 듯하면서도 핵심을 가르는 표현을 찾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찰나, 즐겨 보던 동기부여 영상의 멘트가 뇌리를 스쳐갔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합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하지요. 그럴 때면 그들의 면상에 대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게 어때서요? 이건 내 실패예요. 당신께 아니라."


"그래서, 그게 어때서요?" 한 번 떠올린 이 대목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어로 제작된 영상의 내레이션은 "So what?". 자못 예의바른 표현으로 옮겨 적긴 했지만, 이건 사실 "그래서 뭐?", "그게 어때서?"처럼 살짝 도전적인 어투로 표현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그래서 뭐?" 소리 내어 읊조려보곤 바로 이거다 싶었다.



“So what?” 많은 의미를 담은 간단명료한 두 단어. 급히 결정된 문구는 평소 지향하던 바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선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니까.


"이번 시험 망쳤네!" - "So What?(그래서 뭐?) 다음에 잘 보면 되지!"

"넌 키가 작잖아!" - "So what?(그래서 뭐?) 농구 선수가 꿈도 아닌데"

"또 잘 안됐네.." - "So what?(그래서 뭐?) 다시 하면 되지!"


바꿀 수 없는 상황과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이만한 마음가짐이라면 적어도 후회에 발이 묶여 좌절하는 일은 적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가훈으로 정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복명복창을 종용했다. 


"자, 모두 따라 하세요~ So what?"

"So what?" (떼창)

"느낌을 제대로 실어서 다시! So~~ what?"

"So~~ what?" (떼창)

"그래서 뭐?"

"그래서 뭐?" (떼창)

"이건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면 좋아요!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짝다리를 짚고 어깨를 으쓱하며 떼창)

“....... 어... 짝다리는 빼고 할게요.”


수차례 반복한 후 “So What?“의 의미와 이것이 왜 가훈이 되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이 가훈을 떠올려야 하는지를 세세히 알려 주었다. 


참 좋은 태도이긴 한데, 이건 잘 갖다 대야하기에 설명에 공을 들였다. "그래서 뭐? 담배 좀 핀다고 죽나?", "그래서 뭐? 사과했으면 된 거 아냐?", "그래서 뭐? 이제 내 알바 아닌데?" 이런 데 사용하면 심히 곤란하니까.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 되어야지, 자기기만을 통한 합리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왓은 조금은 스윗한데 쓰는 것이 남이 보기에도 자신이 느끼기에도 근사할 테다.


반복하다 보니, 억양이 과하게 도전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어 물음표를 떼고 구두점을 찍기로 했다. “So what.” 되뇔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말이다. 지나치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붓글씨 체험에서 영어로 가훈을 적은 유일한 가정이 되었다.


뭐가 될 지 알 수 없는 감처럼.


가훈의 효과는 체험이 끝나기 전 고무신 멀리 차기 게임에서부터 나타났다.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대결을 했는데, 막내를 제외하고 모두가 탈락했다. 상품이 있었고 아이들은 비장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탈락했다고 의기소침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 끝났구나'하는 표정으로 아이들은 베실베실 웃고 있었고 약간의 아쉬움을 표출하며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읽히는 "So What."의 기운에 안도감을 느꼈다.


실패에 대한 내성이 필요하다. 살다보면 잘 안 되는 것 투성이다. 새로운 일은 대부분 실패로 시작된다. 이런 현실에서 실패로 인한 타격감을 줄이는 것은 '다음'과 '다시'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끝내 해내는 밑거름이 된다.


출처 : Pixabay


현재의 모습만으로 나중을 예상할 수 없다. 앞으로의 과정에 따라 나중의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실패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지나간 실패는 경험이 되고 지혜가 된다.


떫은감은 수확 후 그대로 먹을 수 없기에 과일이라는 정체성 상 그 자체로는 실패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홍시로 만들거나 연시, 반 건시, 곶감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떫은맛은 빠지고 당도는 극으로 치닫는다. 완연한 환골탈태.


일부 지역에서는 와인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 먹지도 못할 떫은감이 시간과 공을 들여 더 비싸고 귀해지는 셈이다. 태어나보니 흙수저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에게 공감을 살 순 없겠지만, 떫은감을 떠올리는 것은 나에겐 큰 위로이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꽤 괜찮은 핑계가 된다. "아우, 떫어! So what. 익혀 먹지 뭐.", "어? 이건... 흙수저? So what. 스댕 수저부터 구해보지 뭐!"


인생의 보호필름. So what.


뜬금없이 영어로 날아온 가훈에 당황하셨을 법도 한데, 명장께서 So What.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붓글씨에 어울리는 멋진 사자성어를 적어주셨다. 대기만성. 크게 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그러니까 늦음과 작은 실패에 연연하지 말라는 멋진 말이 적혀있었다. 와! 본의 아니게 고민을 안겨드려 죄송했던 마음이 감탄으로 변했다.



익히 알고 있듯, 야구에서 홈런을 가장 많이 치는 4번 타자가 삼진이 가장 많고 농구에서 자유투가 항상 성공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실패가 많다고 실패한 것도, 멍석을 깔아준다고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기준과 환경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실패는 아낄게 못된다. 그리고 실패에서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친해지는 거다. 그렇다고 막 절친이 되라는 것은 아니고 그냥 오며가며 마주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 그저 조금씩 편해지는 거면 충분하다.


실패와 마주치면 "So what."하고 인사를 건네 보자. 제법 떫은 지금의 삶이 언제고 달콤함이 도를 넘어선 스윗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종국엔 "So what."이 "It's OK!"의 다른 말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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