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햔햔 Nov 23. 2023

어느 날, 내보냈던 말이 돌아왔다.

말의 귀소본능

말의 귀소본능




스마트폰이 막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회사 쉬는 시간에 누군가 신기술을 전파했다.


"이제 스마트폰으로 여러 사람하고 인터넷을 공유할 수 있어요. 주변에 한 사람만 인터넷에 연결돼도 자동으로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거죠."


눈을 빛내며 설명을 듣고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의문을 던졌다.


"자동으로 된다고요? 접속하고 허용 같은 거 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갸웃)


내가 던진 질문에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그 형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반응으로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여전히 물음표를 떼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 네트워크라는 게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빠직. 조소가 짙게 배인 말에 순간 욱 했지만 의문만 가지고 있는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티타임이 끝났다. 사람들은 신기술을 배웠고 나는 네트워크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숙한 컴퓨터 공학도가 되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머리맡에 붙어있는 물음표를 떼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신기술의 이름은 테더링. 그건 가까이 있다고 자동으로 인터넷에 연결되는 기술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연결된 사용자가 네크워크를 공유해주고 접속을 허용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울컥.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난동을 부렸다. 억울함인지 분노인지 종잡을 수 없는 그것을 다스리려 노력하고 있는데 뒤에서 미안함이 배인 목소리가 슬며시 넘어왔다.


"음... 이게 테더링이라는 기능을 켜야만 사용할 수 있네.... 허용도 필요하고... 내가 잘못 알았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갔다.


"괜찮아요~ 네트워크라는 게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어라? 어째서 이런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왔지? 의아해하는 이성을 제쳐두고 어수선하던 속이 잠잠해짐을 느꼈다. 내 안에서 갈팡질팡하던 것이 방금 뱉어낸 말이었던 것처럼 속이 편안해졌다.


마치 주인을 발견하고 심하게 버둥거리던 강아지가 내 품에서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내게 머물던 말이 주인을 찾아갔다. 말에도 귀소본능이 있음을 알게 된 사건이었다.


돌아오는 말들


말이 돌아오는 형태는 다양하다. 남의 입을 거쳐 귀로 돌아올 때도 있고 타격감이 대단한 '시련'이라는 묵직한 어퍼컷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스마트폰 보면서 걷다 자빠져 봐야 정신 차리지."


스마트폰 영상을 보면서 걷는 사람을 보고 했던 말이 며칠 후 나에게 돌아왔다. 야심한 밤길에서 뭐에 홀린 듯 유튜브 영상을 보다 나자빠졌다. 와우. 아픔을 떠나 예언의 성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뭔가 당연한 결과를 얻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덕분에 걸으면서 스마트폰을 보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내 말대로’ 정말로 정신을 차린 셈이다.


"저, 저, 저 나쁜 놈!"


과속하는 차량을 보며 했던 말도 내게 돌아왔다. 며칠 뒤 화장실이 급해 과속하던 나는 "급한 놈"이 아니라 "나쁜 놈"이었다. 만약 그때 "급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했었다면, 나는 나쁜 놈이 아니라 "급한 사정이 있는 놈"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누군가를 단정지어버리는 섣부른 말도 이렇듯 돌아온다.


말들이 어디를 거쳐서 내게 돌아온 것인지,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다 때가 되어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내보낸 말은 언제라도 돌아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아... 내가 그래서 안 된 거였구나...


"그러다 정말 식겁한다~"


아... 내가 그러다 식겁한 거구나...


살아오며 흩뿌리고 다녔던 수많은 말을 하나씩 거둬들이고 있다. 무엇이 더 남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고 돌아올 말들이 두렵기까지 하다.


발설지옥의 흉작을 꿈꾸며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지옥은 이승에서 입으로 지은 죄를 벌하는 발설지옥이라고 한다. 여기서 발설은 내 뱉은 말을 뜻하는 발설(發說)이 아니라 혀를 뽑는 다는 발설(拔舌)이다. 맙소사. 혀를 길게 뽑아 두드려 넓게 편 후, 그 위를 소가 밭을 가는 고통을 받는 곳이 발설지옥인 것이다.


만화 <신과 함께>를 보면 이 발설지옥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가에 열려 있는 과일을 맛보고 감탄하는 망자(김자홍)에게  덤덤하게  건네는 저승 변호사 진기한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지금 이 길, 혀예요. 혀를 경작하고 나무를 심은 과수원이죠. 웬만한 흙보다 잘 자랍니다. 똥거름을 따로 뿌릴 필요가 없어요. 제대로 썩어 있죠."


세상 어떤 거름보다 더 썩어 있는 것이 사람의 혀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다보니 왠지 입안이 텁텁한 느낌이다. 게다가 이제는 악플로도 죄를 짓는 이승을 보며 '손가락도 뽑아야 하나?'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염라대왕의 고충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는 게 최선인가?'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막말들. 그런 말들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 막말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미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까는 미안했다.”

“어... 아니에요. 저도 다를 거 없었네요. 죄송해요.”


테더링 사건으로 날이 섰던 나의 신경이 형의 깔끔한 사과에 속절없이 무뎌졌다. 재빠른 사과에 살짝 당황했다. 어쩜 저리도 사과가 깔끔할까... 내심 감탄하기도 했다. 동글동글 예쁜 사과. 나는 그 사과를 받자마자 바로 돌려주었다. 형과는 더욱 돈독해졌고 과오를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멋지다는 것도 알게 됐다.


위로의 말은 위로로 돌아오고 격려의 말은 격려가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내게 왔던 배려와 애정의 말은 다시금 귀소본능을 발휘해 그들의 주인에게 돌아간다. 누군가의 입에서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작은 감탄이 나오는 이유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돌아올 말들을 잘 선별해서 흩뿌려볼 요량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내가 뿌린 말이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할 때, 세상까지는 몰라도 나는 조금 더 살만해질 거라 믿으면서. (웃음)


부디 좋은 말을 많이 뿌리고 다니길. 혀에서 향기가 나길. 그렇게 주고받은 좋은 말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만해지고 발설지옥의 과수원엔 흉년이 들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