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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온 Feb 03. 2021

2018년 8월에 쓴 편지

[선거가 끝나고 난 뒤] #20 선거와 평가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온이에요. 

모르셨겠지만 저도 이 뉴스레터 프로젝트의 멤버였답니다. 

초반에 불의의 사고로 제 주소가 누락되어 스타트를 놓치고서 곧바로 끼어들지 못했어요. 여러분들의 귀한 메일을 받아보고, 일상을 엿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는 즐거움을 동반한 죄책감이 산더미처럼 불어나더군요. 업무 목적이 아닌 편지쓰기는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이라 메일이 올 때마다 당장 답장하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도무지 시작을 못 하겠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메일을 씁니다. 제가 최근에 참여한 한국성폭력상담소 <일상을 바꾸는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후기를 써서 간만에 긴 글을 페북에 올렸더니 로딩시간이 너무너무 길어서 그걸 못 견디고 메일창을 켰어요.


저 역시 선거가 끝나고 난 뒤에도 선거와 관련한 일들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한 가지는 지방선거 선거평가를 전국운영위차원에서 승인하는 작업이고 이를 위해서 몇차례 워크샵도 하고 초안도 만들고 이번 일요일에 대전에서 토론을 하게 돼요. 지역마다 상황도 선거 분위기도 달랐는데, 과정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이후 평가의 자리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아요. '평가'라는 이름은 단 자리는 늘 어렵고, 어쩐지 피하고 싶고, 한계를 정직하게 마주하자고 다짐해도 잔뜩 긴장해서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그래서 준비없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judgemental한 사람들이 무척 힘들어요. 주로 앞에선 괜찮은 척하고 다음엔 슬쩍 피할 뿐... 상대의 그런 태도나 부정적인 기운이 옮을까 걱정이 되는건 제 스스로가 불안하기 때문이겠죠. 저 역시 금세 다른 사람들을 여러 가지 기준으로 평가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고요. 평가를 왜 무엇을 위해 하는지도 참여하는 사람마다 달라서 그것부터 합의하기도 어렵더라구요. 자신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강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저는 자리를 만드는 입장으로서 문제제기를 받고요. 


또 한가지는 차기 운영위원장을 뽑는 선거에 관한 거예요. 후보 등록이 다 되지 않아서 등록기간이 계속 연장되는데 부담이 점점 커져요. 2년 전에 나는 왜 출마하고자 마음을 먹었는지 돌아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일이 얼마나 어렵고 내 뜻대로 안 되는가 매일매일 마주하고 있어요. 상대의 사정이 너무 이해 되니까, 어느 한 방향을 강하게 권유하기 어려워요. 제가 잘하는 건 스스로 어려운 결심하기 이고 남들을 결심시키는건... 걍 울고싶어질 뿐.. 정말... 더위는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이 문제 때문에 힘든 나날입니다. 


정당에 대한 고민도 깊어져요. 지난 한 주는 노회찬 의원을 애도하며 '진보정당'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보냈는데요. 그간 녹색당이 진보정당의 역사를 계승하는 정통(?)이라 생각지 않았고, '진보정당'이라고 말했을 때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따져보지도 않은채 두루뭉술하게 당위적으로 언급되는 것도 맘에 안 들었거든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느 계보 위에 놓을지.. 스스로가 선언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어떤 맥락에서는 오만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잘난 척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허울 좋은 척 해왔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거면 어떡하나. 아무튼 "진보정당"이라는 게 남은 여름 저의 키워드가 될 듯해요. 역사부터 되짚어보려구요. 그래서 노회찬과 함께 민주노동당에서 일했던 정책가이자 기획가 고 이재영 씨의 유고집을 읽는 중이에요. 2013년 쯤 사두고 읽지 않았는데, 잠결에 불현듯 이 책을 읽어라는 계시를 받아서..... 


요즘 너무 머리가 복잡하고 고민이 많은데... 징징대면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쓸게요... 매일의 좌절 속에 답이 없는 질문만 던져봅니다. 


녹색당에게 지금은 어떤 시기, 어떤 때인가? or 지금을 어떤 때로 규정하고, 어떤 방향을 향해 만들어가고 싶은가?

이 시기에 녹색당에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이며 누가 보여줄 수 있는가? 팀은?

정파로 구성되지 않은 녹색당 같은 정당에서 정치인을 키워낸다는 건 뭔지. 키우는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는지

녹색당은 어떤 조직인가 어떤 조직이 되고자 하는가/ 어떤 신뢰관계를 만들어가는 중인가

지금 세대가, 내 또래가 정당운동에 삶을 건다는 게 뭘까. 진보정당 정치인의 새로운 모델이 뭘까. 지속가능성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마지막으로, 2016년에 있었던 청년녹색당 성폭력사건의 평가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어요. 제 임기는 이 사건으로 시작해서 이 사건과 함께, 이 사건을 통과하며 마무리 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요. 잘 고백한 적 없지만, 저는 임기내 이 사건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순간이 없어요. 업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함께 일하고 의지했던 동료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아파서 떠나는 걸 보는 것도 아픈 구석으로 남았구요. 저도 그 시간들을 견디는 동안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치유할지는 임기 끝나고 여러 가지를 통해 시도해볼 예정입니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지난번 여러 당사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힘든 회의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마음이 열리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두려움과 미움을 내려놓고 속마음을 이야기했고, 현장의 공기가 변화하는 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그런 순간이 가능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식으로, 모르겠지만 모르겠는 방식으로 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임기전 해야할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요약하니 '선거'와 '평가'네요.  

잘 하고 싶고, 비판받는 게 두려운 저에게, 대중들에게 평가받는 선거와 그외 평가들이 밀집된 이 시기가 참 부담스러워요 ㅋㅋ 그래도 임기를 마치면서, 나홀로워크샵을 통해 제 임기 전반을 냉철하게 돌아보는 평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저도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두들 숙면 중이기를 바라며 

주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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