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일기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by 당신의우주

나 자신이 엄청 싫어지는 날이 있다.

아이들이 종일 나에게 짜증을 내고 울어재끼고 떼쓰는 것에 시달리다 보면, 가만히 서서 저녁으로 줄 국을 뜨다가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내가 감정 쓰레기통인가? 머리가 멍해지고 몸과 마음이 정지상태가 된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다 놔버린다. 집 안이 온통 어질러져있는데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너무 피곤하고, 지쳤고, 다시 정리할 용기가 안 난다. 다시 또 원상 복귀될 텐데, 그걸 마주할 것이 두렵다.

다행히 신랑이 퇴근을 하고 아이들을 봐줄 테니 얼른 나가서 쉬고 오라고 한다. 무작정 차를 몰고 출발했다. 그런데 갈 데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책임감에 다음 날 아이의 체험학습 준비물을 사러 마트에 간다. 간 김에 델리코너에서 초밥을 집는다. 저녁도 못 먹고 나와서 배가 고프다. 스트레스를 받으니 드라이브나 할까 하고 감자칩도 사고 물도 산다. 그런데 이 어두운 밤에 차를 세워두고 먹을 장소도 마땅치가 않다. 차 내부등을 켜고 먹자니 밖이 깜깜해 안이 다 보일 것 같다. 결국 아파트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집 안을 바라보며 들어가기가 싫어진다. 아이들이 아직 안 자는 것 같다.

불 꺼진 차 안에서 초밥을 먹는 것이 어렵다. 이 와중에 뭐라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 환한 도심 속으로 가면 좀 조명이 있겠지, 하고 다시 내비게이션을 켠 후 목적지를 설정한다.

갓길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다. 조용한 차 안이 어색하다. 불안하면서도 안도감이 든다. 빌딩숲에서 야근을 하는 이들이 켜놓은 불빛에 기대어 늦은 저녁을 먹는다. 사람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드물다. 신세가 처량하면서도 머리가 좀 식는다. 물리적으로라도 거리를 두고 잔뜩 웅크려서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게 도움이 된다.

자괴감이 밀려온다. 감정 조절도 못하고,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온갖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것처럼 행동하고, 내 밑바닥을 보고, 표정관리가 안되고, 기분을 휘두른다. 모든 게 엉망이다. 일상에 해야 할 일들을 매일 한결같이 해내는 게 어렵다.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하루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너무 배불러서, 복에 겨워서 이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하는 한심한 생각도 든다. 더 극한으로 바쁘면 이런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을 텐데 하고 말이다.

꾸역꾸역 먹는 밥이 잘 안 넘어간다. 이러다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 열이 받을 때는 식사를 걸러야 한다. 이제 소화도 잘 되는 나이도 넘긴 것 같다. 따뜻한 것 위주로 먹어야 하고, 식후에 찬 것을 먹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작년 연말 치맥 파티 후 밤새 고생해서 응급실을 갈 뻔했던 생각에 청춘은 갔나, 자기 관리가 요 모양 이 꼴인가, 하는 자아비판이 이어진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다. 깊은 심해에 잠수해서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별 내용 없는 액션영화를 틀어본다. 그런데 도무지 예전처럼 빠져들기가 힘들다.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들은 피한다고 외면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완전한 휴식도 아닌, 완전한 일의 몰입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저울질하고 있는 모양새다.

집에 돌아오니 모두 다 뻗어서 자고 있다. 갑자기 마음이 짠하고 미안하다. 부족한 나를 이해해 주는 가족들이 결국 나의 울타리가 된다. 저렇게 괜찮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인데, 내가 왜 그랬을까, 자책해 본다. 내가 책임감 있는 어른이라고, 부모라고 할 수 있나, 아직 멀은 것 같다.

서늘해진 밤공기와 함께 가라앉은 일상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피곤이 몰려오는데 내일 체험학습에 입혀 보낼 첫째 아이의 활동복을 세탁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다. 몸부터 움직인다. 내일 아침까지는 옷이 마르길 바라면서 세탁기를 돌린다.

이대로 자다가는 잠에 푹 들 수 없을 것 같다.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속상하고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로 눕기가 싫다. 눈두덩이가 무겁고 내 영혼은 불 꺼진 도심을 배회하는 듯한 느낌이다. 울적하고 슬프다.

대충이라도 마음을 정돈하고 자야 한다. 그래야 내일 아침에 리셋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힘들 땐 무조건 감사일기를 써보라고 강조하던데, 이거라도 해봐야겠다. 효과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써본다.

세 개까지 적어내려가니 진짜 기분이 나아진다. 내친김에 다섯 가지까지 써본다. 내가 오늘 완전히 최악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맡은 할 일을 해냈고, 최선을 다했다. 기특하고 수고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최악이 아니었다. 고마운 점도 있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하루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래도 주저앉아있기 잘했다. 지칠 때는 아예 바닥에 앉아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할 수 있을 때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가면 되니까 말이다. 감사할 것을 찾아내려니 별거 아닌 것까지 들여다보고 의미를 부여한다. '운전을 할 줄 아니 언제든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다'라고 적었다. 별거 아닌데 괜히 웃음이 나온다. 감사일기 쓸 때 이외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나의 일부이다. 그 사소한 것이 나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쓰다 보니 이쯤 하고 내일은 힘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잘 해내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이다.

빨래가 거의 다 돌아갔다. 내일 아침 다 마를까, 걱정한다. 지난 일을 뒤로하고 어느덧 일상의 흐름 속으로 다시 스며드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감사일기는 실제로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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