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혹은 담당자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시행할 프로그램을 검토하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동남아시아라는 하나의 그룹이긴 하지만, 각각의 특성을 살린 고유문화가 있는데 어떻게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적용시키는가 였다. AK(이곳에서는 직책보다는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심지어 인턴인 나조차도 상사인 그녀를 닉네임인 "AK"로 부른다.)에게 가서 나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턴의 작은 질문에 열정적으로 대답을 해 주었다.
충분히 공감한다고. 하지만 regional office(아시태평양본부)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하나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서 아시아 지역 사무소에서 리서치나 프로그램 진행 초기단계의 가이드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가령, 라오스에서 만든 여성폭력철폐 자료집이 있다고 치자. 여러 가지 모범 사례와 사진들이 실려 있는데 반팔과 전통의상을 입지 않은 사례집 속 그림들을 어떻게 아프가니스탄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지만 정작 지역 사무소 직원들은 본부에서 제시한 사례집에 굉장한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그 자료집을 발판으로, 반팔을 입고 있는 예시 그림의 인물들에 문화적 특성을 덧칠해 긴팔과 사리를 입히고 콘텐츠는 크게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의 가장 큰 역할은 초기 level에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는 개발도상국들을 위해,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이다. 세부적인 문화적 접근은, 본부에서 제시한 후 현지 오피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AK는 나를 person in charge(즉, 담당자)로 만들 작정인가 보다. 그녀와 식사를 하며 얼핏 들은 건, 1월~8월 정도까지는 기획 단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9월부터는 그 기획들을 실제적으로 시행하는 시간들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쁘고, 더 재미있다고. 사브리나 말처럼 제때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획들이 어떻게 시행되고 적용되는지 실제 내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하지만 불안해지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 경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나의 이력서만 의지해서 큰 것을 줬다가 괜히 실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사브리나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를 믿는다고. 불안한 마음이 있으면 AK에게 공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레 겁먹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전하라고. 그렇다.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안 했는데 내가 굳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처음 시작은 겁나는 법이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도전을 하자. 얼마나 기다려 왔던 기회이고, 오히려 일이 없을까 봐 걱정을 했던 나날들인가. 학교와 정부의 후원까지 등에 업고 왔는데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싶지 않다. 발란스를 지키며, '근사하게' 일하자.
숙소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활달한 목소리로 서양 아이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건네던 중국어 억양이 섞인 여자아이가 나에게 와서 "Hi, nice to meet you"라며 말을 건넨다. 특유의 중국어 억양을 놓치지 않았던 터라, 영어로 말을 건네었을 때 중국어로 대답을 했는데 이 아이, 표정이 영 밝지 않다. 게다가 끝까지 나에게 영어로 대답하는 건 뭐지. 짧은 순간, 이 아이는 나와 중국어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도 굳이 같은 중국인 친구를 놔두고 서양 남자아이 앞에 앉아 유니크로 쇼핑을 운운하며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아 이 친구는 해외에 나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특히나 서양 아이들과) 영어를 쓰고 싶어 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뭐, 상대가 정 그렇다면 나도 필요한 순간에만 버터 섞인 미국식 억양으로 대화를 해 주면 되는 거다. 중국에서 1년 어학연수를 했다는 태국 현지인 직원도 중국인 인턴에게 중국어로 말을 거니 대꾸를 안 해주더라며 중국인들끼리는 중국어만 쓰고 외국인에겐 무조건 영어만 쓰려고 하는 것 같다는, 나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으니 꽤나 확실한 것 같다. 이 아이들, 외국 체험 초기단계라 그런 것 같다.
진은 조금 달랐다. 약간 차가운 인상이라 크게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웃을 때는 인상이 확 변한다. 알고 봤더니 한국에서 학부를 마쳤다는 그녀는, 내가 한국인인 것이 편한 듯했다. 앞선 중국인에게 받은 편견이 있었던 터라 이 친구에게는 중국어로 말을 걸지 않았는데 조금 더 친해지면 많은 중국인들이 왜 그런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함께 이야기를 하며 걸었던 출근길, 그녀는 나에게 한국인이니 JPO나 YPP에 도전해보는 건 어떠냐고 물어온다. 사실 텝스 점수가 높아야 한다는 것밖엔 아는 것이 없었는데 마음이 살짝 동하긴 했다. "그러는 넌 어때? 중국은 JPO가 없니?" 9층에서 일한다는 진은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찰나 내 질문에 쿨하게 대답했다. "중국은 아프리카에 밖에 투자를 안 해."
오래전, 네덜란드였을 거다. 풍차의 나라에 사는 또래 여자아이랑 펜팔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했던 이 한마디가 너무나 강렬했다. "난 유럽인이라 자랑스럽고 여기서 태어난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 고작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한 줄에 순간 유럽인이라는 그녀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자긍심, 그리고 오버일 수도 있지만 아시아인인 나를 향한 살짝궁 공격도 느껴졌고 나 또한 나는 내가 아시아인이라 자랑스러운가, 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되었다. 그때 다시 한번 상기했던 것 같다. 난 아시아인이다. 그리고 아시아지역본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난 소속 커뮤니티에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안드리아가 준 자료를 뒤적이며 끙끙대는 내 모습을 봤는지, 온은 웃으며 "너 괜찮아?"라고 물어본다. 사실은, 너무 감사하다.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involve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는 AK가 나에 대한 칭찬을 했다며,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며 격려를 했준다. 국제적이고, 프로페셔널하며 업무 욕심이 있다는 칭찬을 했다는데 어쨌든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감사하고 더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의욕이 절로 솟는다.
오늘 안드리아가 준 자료를 리뷰하며 배운 점들:
1. Minor 한 perspective로 보지 말 것.
: 베트남 설문지를 보며 사실은 행정적인 시각으로 리뷰를 한 듯하다. 문법이라든지, 단어 선택 등등을 지적했는데 사실 이것은 regional office 시각에서 적합하지 않다. Regional office는 전체적인 "조언"을 해주는 입장이기에 그런 minor 한 것은 country office에서 수정하거나 mange 해야 한다.
2. Feedback은 전체적인 concept으로 하는 것.
: 큰 그림을 보고 피드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상황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하고, 앞뒤 연결성, 목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3. "How do you think?"
: Feedback을 묻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내 의견을 중구난방으로 날리기보다는,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큰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조언을 해 줘야 할 것이다. 내 의견을 묻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제에 대한 관심과 배경지식 그리고 비판적인 시간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번 한 주의 목표:
1. Aus project에 involve 한다고 생각하고 관련 문서를 숙지하고 궁금한 점 등은 정리해서 묻고, 내 의견을 가질 수 있을 것.
2. UNESCO와의 미팅에도 적극 참여하고 국제기구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고 이슈에 접근하는지 배울 것.
3. 이번 한주까지는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생각하고 조직과 업무에 적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