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는 없다
여행과 삶은 닮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절묘한 타이밍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 거짓말로 나를 속이는 사람도 있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임기응변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 원하던 여행지에 도착했지만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닐 수도 있고,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며 즐거워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실망을 했다는 의미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슈퍼바이저는 바쁜 와중에 내 진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명감이 투철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동료들은 나를 세심하게 챙겨준다. 퇴근을 하면 동료들과 가끔 사적으로 만나 끈끈한 우정을 쌓는다. 내 자존심은 "아니야! 나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니란 말이야!" 소리칠지 모를 일이지만, 이런 상황 즈음은 되어야 나는 아마 가끔 머리가 지끈거린다거나, 여기서 잘하고 있는가라는 자아성찰적인 질문을 던진다던가, 내가 여기서 필요한 존재이기는 한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호주 정부의 펀딩을 받아 라오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핀란드 출신 JPO 안드리아. 태국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그녀 또한 아직까지 업무와 나라와 사람에 적응 중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짬이 안된다. 안드리아와 슈퍼바이저의 출장과 팀의 행정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G스태프 태국인 On. 행정처리 업무이다 보니 아무리 국제기구라고 하지만 태국어를 모르면 그녀의 일을 도와줄 수 없다. 에너지 넘치는데 키까지 커서 앞에 서면 괜히 주눅이 드는 슈퍼바이저는 나 같은 말단 직원을 일일이 챙겨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태국까지 어렵사리 온 나이 많은 경력직 한국인 인턴은 어떻게든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욕심에 두통이 인다.
이런 욕심쟁이 인턴에게 슈퍼바이저는 생각하지도 못한 타이밍에 어떤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질문은 이쪽 분야에 오래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답변을 하기에 다소 난감한 것이었다. 의욕과다인 인턴은,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리서치를 해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의견과 함께 그녀에게 답신을 남겼다. 그렇게 고심해서 보낸 메일에 대한 그녀의 답장은 단 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고작 17일 출근한 인턴이 얼마나 똑똑한 제안을 할 수 있겠는가. 이쪽 분야에서 수십 년간의 경험을 쌓은 사람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시행에 옮기기에 타당성이 부족하거나, 혹은 아예 경로에서 벗어난 답변일 수도 있다. 의견은 자유로이 제시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피드백까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바라던 친절하고 매너까지 겸비한 동료들이 내가 전문성을 쌓을 수 있도록 중요한 업무를 주는 데다, 지치지 않도록 인간적으로 격려까지 해 주는 판타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팀 내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턴이니까. 반대로, 인턴이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사람들은 너그러이 봐준다. 자유분방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엉뚱한 질문을 해도 프로들은 노하우가 담긴 답변을 기꺼이 들려준다. 도전하고 실패해도 실적과 책임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급이기 때문에 월급값 하라는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6개월 간 내가 누리게 될 혜택이다.
내가 바라던 일이 계산대로 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세심하게 돌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계획하고 원하던 여행지에 왔다는 것이다. 여행지의 날씨는 흐릴 수도, 비바람이 칠 수도, 맑을 수도, 안개가 낄 수도 있다. 여행지의 사람들은 내게 친절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돈벌이 대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여행지까지 오느라 수고한 나에게 격려를, 비가 내릴 때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잔 하는 여유를, 수많은 사람들 중 하필 나에게 친절한 그들에게 진심이 담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 지금 이 순간과 이후의 내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