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 디자이너에게 스타트업이란
디자이너가 첫 직장으로 스타트업을 선택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보통 첫 직장은 누구나 아는 큰 곳에서 시작하고 싶어할 것 같다.
나는 학부 시절부터 총 4곳의 스타트업을 옮겨다니며 일했는데 그 때 실행한 것들이 지금 내 역량의 근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무 역량과 시장에 대한 이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첫 직장으로 스타트업을 선택하고 싶은 디자이너 분이 계시다면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빨리 나의 아이디어가 반영되는 곳, 그곳에서 겪었던 설렘과 감동, 아쉬움을 공유해본다.
가장 현실적인 장점을 적어본다. 내가 어떻게 학교를 다니면서 근무할 수 있었을까? 나의 사정을 이해해준 대표님들 덕분이다. 스타트업은 언제나 일손이 모자라다. 실력만 된다면, 실력 없어도 할 의지만 된다면 주5일 9to6의 형식적인 근무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첫 스타트업(지금은 망해서 없어졌지만..)에서는 주 2일 출근을 하게 해주었고, 그 다음 스타트업에서는 주 5일이지만 주말을 포함해 유동적으로 스케줄 조정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곳에선 내 졸업 전시 기간 동안 3주를 비워주셨고, 재택근무를 자유롭게 해도 됐고 3주 간 유럽 여행도 가게 배려해주었다.
조금이라도 규모가 있는 회사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최소 직원이 10명만 되도 시스템이라는 게 생기고, 근태에 대한 눈치가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프리랜서로도 많은 작업을 해왔는데, 자율적으로 업무를 제안하고 행하는 나의 업무 방식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것은 슬랙에서 데일리 스크럼을 하고, 지라와 컨플루언스를 도입해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현황 공유가 투명하게 됐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근무 환경을 구축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brunch.co.kr/@outlines/10)
하지만 평범한 회사라면 평일 낮에 카페에서 작업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나는 그 삶에 들어와버렸다...
디자이너에게 자유로운 근무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창의성에 있다. 엉덩이 오래 붙이고 있는다고 신박한 디자인이 나오진 않는다. 회사에 앉아있으면 왔다갔다하면서 사람들이 디자인 과정에 왈가왈부 감놔라 배놔라 좀만 옮겨봐라 컬러가 이상한 거 같다 입디자인 오지게 듣는다. (옆에와서 와ㅏㅏ 이거 포토샵이에요? 너무 신기하다 이것도 할 수 있어요? 어쩌고 저쩌고ㅠㅠ 하지마요 제발ㅠㅠㅠ)
나는 내가 공유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보여주는 게 좋은데 다른 업무와 다르게 시각적으로 너무 쉽게 까발려지는 업무이기에 중간에 방해 받는 게 스트레스였다.
회사에서 나는 이케아 나뭇잎 케노피 아래에 숨어 디자인했는데, 그 때의 업무 환경에서 효율성이 제일 높았던 것 같다ㅋㅋㅋ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장점이라 예상한다. 멤버 수가 적다보니 서로 가깝게 의지하며, 열렬히 달리게 된다. 수평적인 관계는 당연하고 우리의 문제점, 개선점, 비판할 점에 대해 가감없이 말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으니 그 에너지를 온전히 일에 쏟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내 문화, 워크샵, 업무 방식까지도 맘대로 제안하고, 먹고 싶은 간식, 가고 싶은 회식 장소 모두 우리들 맘대로다ㅋㅋㅋ 우리가 정하는 것이 곧 우리 회사의 문화가 된다. 가장 큰 결정부터 아주 사소한 것까지 내 의견이 가장 빨리 반영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스타트업이다.
나는 주도적인 성격이라 내가 틀리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말하고 그 대안 혹은 설명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함께 일하는 멤버 분들이 서운해하신 적도 있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적도 있지만 그 때만큼 내가 일에 미쳐서 몰입하고 달렸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디자이너에게 스타트업을 추천하고 싶은 가장 강력한 이유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디자인의 중요도가 가장 낮기 때문이다. 기획과 개발, 마케팅에 쏟기에도 모자른 비용과 시간이기에 디자이너는 언제나 가장 촉박하게, 가장 적은 예산으로 결과물을 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이 있다면, 주도적으로 디자인해보고 싶다면 스타트업이 제격이다.
디자이너를 구하고 싶은 스타트업이라면 디자이너의 선택과 결정을 믿고 결과물까지 빠르게 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을 명시해주었으면 한다. 기본적으로 폰트(산돌이나 윤 멤버십), 어도비 클라우드, 프레이머 등의 프로토타이핑 툴, 도서 지원, 강연 지원 등은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복지!
누구도 평가하는 곳이 없다.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곳. 그게 우리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회사 웹사이트를 직접 개발하고 싶어서 처음엔 워드프레스 커스터마이징해서 구축을 해봤고, 개발자님이 초안으로 개발해주신 후에 직접 코드를 수정해 웹사이트를 완성했다. 일당백이 당연한 곳이다보니 워드프레스로 웹을 구축하는 것도 스타트업에서 배운 생존 기술이다. 나는 디자인만 하고싶다 하는 분은 스타트업이 맞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인쇄물 후가공이나 굿즈 제작, 디자인과 상관없지만 SNS 운영까지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이라면 뭐든지 해봤다. 스타트업도 스타트업 나름이라 내가 운 좋게 그런 환경에 놓였던 것일 수 있지만 내가 회사를 위해 이런 시도를 기꺼이 해보겠다는데 말릴 대표님이 있을까.
막상 큰 회사에 오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다. 기업 문화의 문제보다는 직원 수 자체가 많아지면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해도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이 든다. 제안서도 써야되고 설득도 해야되고, 이게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검증도 해야한다. 이 '검증'이 정말 답답하면서도 불가피한 비효율성이다. 이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성공할 뭔가를 기획할까?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시장에서 사랑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스타트업의 좋은 점은 결과 상관없이 일단 해봐도 괜찮다는 거다.
내가 해본 일의 성과가 좋다면 아주 크게 칭찬 받고, 실수 또한 격려 받는다. 토스는 이미 많이 커진 기업이라 스타트업이라 부르기 민망하지만 최근 디자인 굿즈로 '실패해도 괜찮다'는 의미를 담은 뱃지를 만들었더라. 해시태그 스티커도 만들고 다양한 굿즈를 만들면서, 특히 디자이너에게 긍정적인 기업 문화를 형성해가는 것 같다.
스타트업은 생존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지금의 트렌드에 뒤쳐지면 안된다. 큰 기업에선 정해진 주기, 혹은 조금 긴 주기로 다음 스텝을 기획하는 반면 스타트업은 하루하루 변하는 트렌드에 대응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소식을 빨리 접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종 스타트업 밋업, 컨퍼런스, 세미나, 워크샵 등에 참여했다. 업무 시간이 끝나고 끊임없이 정보를 습득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이 행위를 좋아했기 때문에 즐거웠지만, 빠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다음을 상상하는 게 힘들다면 스타트업이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때 들은 정보들과 빠른 습득 능력은 지금까지도 크게 도움이 된다.
우리 팀은 슬랙에 좋은 자료를 많이 공유했는데, 오늘 봤던 기사, 감명깊게 본 다른 서비스, 새로 나온 서비스에 대한 리뷰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늘 이런 서비스가 나왔던데 이건 좋고 이건 별로더라, 이런 거 우리도 해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은 우리 꺼에 반영해야겠다 - 등 모든 것이 서비스에 대한 영감이 되었다.
이 또한 모두들 예상하는 문제일 것 같다. 스타트업은 말그대로 막 시작한 벤처회사다. 기존에 없던 아이템으로, 기존 시스템에 대한 반발로 시작했기에 전통적인 성공 방식을 따르기 어려울 수 있다.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사무실이 없을 수도 있다. 당장의 월급 대신 미래의 지분으로 분배받을 수도 있고,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업무적인 평가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힘든 부분은 당연히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까'하는 불확실성이다. 이 불확실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면 스타트업은 너무나 힘든 곳이다. 돈이 없으면 투자자의 입김이 세지고, 본래 우리가 하려던 비지니스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멤버들끼리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규모가 커지면 그에 맞춘 기업 문화 확립에 시간을 쏟지 못해 어줍잖게 수직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내가 이 문제들을 피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직접 겪은 적도 있고 스타트업에 있는 다른 지인들에게도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선택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값진 경험이었고, 지금의 나를 이룬 근간이 되었다. 함께 일했던 모든 멤버들에게 아직도 긍정적인 감정과 응원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진정으로 그들이 성공하길 바란다. 서비스 유저 몇 명 늘었다고 환호했을 때, 내가 만든 서비스가 앱스토어에 처음 올라갔을 떄, 우리의 이름이 담긴 뉴스 기사가 떴을 때, 유저에게 피드백을 받았을 때...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가슴 뛰는 매일을 만들었다.
대기업의 안정성과 스타트업의 자유로운 문화, 열정적이고 존경스러운 멤버들까지 가진 회사는 드물다. 스타트업에 있어보고, 다른 스타트업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외주 하면서 다른 회사 사정 들어봤지만 모든 게 완벽한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다못해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가도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만은 신념처럼 받들고 싶다, 하는 Core Value 하나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회사를 찾자. 나도 아직 완전히 찾지 못했고, 심지어 해마다 바뀌기도 한다. 지금은 내가 20대고 어린 편이라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고 있긴하지만, 나중엔 내가 그 선택지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 놓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