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간의 디자인 외주로 얻은 생존 기술
문이과 학생들과 다르게 디자인과 학생들은 실무를 꽤 쉽게 접해본다. 디자인 관련 외주가 정말 많기 때문. 나는 꽤 일찍 독립해서 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2학년 때부터 자잘하게 디자인 외주를 시작하게 됐는데, 잘했던 외주도 있고 못했던 외주도 있어서 반성과 성찰을 거치며 팁들을 정리해봤다. 내가 지켰던 것도 있고, 그 때 이랬다면 좋았겠다 싶은 것들도 있으니 참고해주시길.
많은 친구들이 외주를 어떻게 구하냐고 묻는다. 사실 생판 남한테 구하기는 정말 어렵다. 내가 일했던 회사 대표님이 소개해주거나, 알바했던 곳에서 알던 분이 외주를 맡기거나, 학과 게시판에 선배님이 올린 외주를 하는 등 시작은 언제나 지인 기반이다.
첫 시작은 아무래도 명함일 가능성이 높다. 갓 입학한 새내기가 뭘 배웠다고 큰 외주를 하겠는가. 간단하게 로고 만들고 명함 시안 만드는 걸로 10~30만원씩 벌었던 것 같다. 휴학하고 회사생활하면서 여러 대표님이 그 다음 외주를 이어서 소개해주셨고, 팜플렛, 포스터, 책자 등 편집 디자인 외주로 70~80만원씩 벌며 비용을 높였다.
그 후 보통의 편집 디자이너들이 갈아타는 테크트리를 나도 따랐다. 지면에서 화면으로 범위를 확장한 것. 웹 디자인을 시작하며 100만원 이상을 벌기 시작했고, 웹 구축이 가능해지면서 200 이상의 외주들이 들어왔다. 전체 브랜드 컨셉 잡는 외주, 편집디자인 + 웹디자인과 구축 + 브랜딩 + 패키지 등까지 통합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UX 플래닝, UI 외주 등으로 이어지며 잡탕 디자이너가 됐다^^...
외주가 외주를 물어오려면 작더라도 맡은 외주를 150% 정성껏 하는 수 밖에 없었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에게 맡기는 셈이니 그들에게 내가 프로라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 2학년 때 했던 로고 외주를 돌이켜보니 컨셉 시안을 5개 만들고 각각의 스케치, 전체 브랜딩에 반영됐을 때 목업 이미지, 약간의 브랜드 컨셉 제안까지 했더라. 당시엔 내 실력이 좋은지 나쁜지 가늠할 방법이 없어서 무조건 성실하게 많이 했던 것이다. 모든 외주를 아주 열심히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이 클라이언트가 괜찮은 외주를 계속 줄 거 같다 싶을 땐 내가 쓸모있고 가성비 좋은 디자이너라는 걸 어필해야한다. 조금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 같다.
킥오프 미팅에서 디자이너가 할 일은 클라이언트의 상담사가 되어주는 것이다. 일단 듣자. 뭘 원하는지 할 수 있는 만큼 쏟아내보라고 한 다음 차근차근 정리해본다. 외주를 진행하는 클라이언트는 보통 자영업자거나 스타트업이거나, 하청이 하청을 맡기거나 하는 경우인데 그들이 이 외주의 산출물로 어떤 결과를 내고 싶어하는지 그 목표를 먼저 알아야한다.
이를테면 다음 주에 행사가 열리고 그 때 소개할 웹사이트가 필요한 클라이언트라면 세련된 디자인보다는 일단 기한 내에 웹사이트가 오픈되는 게 중요하다. 쓸데없이 고퀄리티 디자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목적으로 나에게 왔는지 생각해보고 우선순위를 세워주고 그에 따른 결과물을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보여줘야한다. 기대치를 너무 올려놓으면 내가 힘드니까. 산출물의 질과 양, 우선순위를 미리 생각해두자.
클라이언트는 보통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 알 때도 있긴 한데 디자이너처럼 시각적으로 상상해내긴 어렵다. 머리 속으론 자신의 브랜드가 우주 최강 멋진 브랜드고 제일 간지나는데 디자이너가 이걸 구현 못해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의 언어는 모호하다. 말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로고를 만든다면 그 회사 이름이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는지, 이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은 뭔지, 타겟 고객은 누군지, 경쟁사는 어딘지 알면 좋은데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한테 본인이 생각하기에 디자인 언어라고 생각되는 걸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피자나라 치킨공주 로고를 만든다면 타겟층이 적당한 맛에 양 많은 거 찾는 대학생들, 그들에게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이미지로 편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브랜드를 추구하며 경쟁사는 피자스쿨일테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보통 임팩트 있는 거요! 애플 같은 거!(< 제일 황당했던 말ㅋㅋㅋ 애플 같은 게 뭐야ㅠㅠ) 간지 나는 거! 귀여운 거! 예쁜 거! 이런 추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한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소비자에게 어떤 디자인이 먹힐지 생각해보고 설득하는 게 좋은 결과물을 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에게 직접 예시를 들어보라고 하는 게 편하다. 본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피자 브랜드가 뭔지, 평소에 좋게 봤던 피자가게가 어딘지, 예쁘다고 생각됐던 배달음식 브랜드가 있는지 등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브랜드 혹은 회사를 예로 들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걸 바탕으로 무드보드를 짜보고 맞다고 하면 그 때 본격적인 디자인을 들어간다. 이렇게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맞는 방향으로 디자인 시안을 만들었는데 클라이언트가 내키지 않아하는 것 같다면? 일단은 클라이언트의 심정과 그가 추구하는 방향에 내가 공감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한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얘는 내 맘을 몰라! 라고 느끼면 신뢰가 깨지기 마련. 내 실력으로 설득하는 것도 좋긴 한데 심정적인 공감을 먼저 불러일으키는 게 서로 소통하기 편하다.
모든 일이 그렇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내가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해보자. 당연히 빨리 좋은 결과물을 내가 부은 돈만큼 뽑아먹고 싶은 게 인지상정. 디자이너를 이해해줄 수 있는 클라이언트는 많지 않다. 클라이언트가 하고 있는 비지니스에 관심 가지고 있고, 그 일이 잘 되길 바라고, 내 디자인이 그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아가 작은 아이디어들도 제안하며 당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어필하자. 그러면 디자인 뿐 아니라 비지니스와 마케팅에 대해서도 좀 아는 센스있는 디자이너로 보일 수 있다. 즉, 클라이언트가 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태도와 결과물을 갖다주는 것. 마치 네가 말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건 케바케라 강요할 순 없을 것 같다. 나는 워낙 호기심이 많고 비니지스/마케팅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디자인 아웃풋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이것저것 리서치를 많이 하는 편이다. 2학년 쯤엔 제약회사에서 파스 패키지 만드는 알바를 했었는데 파스에 넣을 패턴 만들 때 파스 재질과 파스 제작 과정도 보고, 파스 패키지를 정말 열심히 봤다.
보통 첫 미팅은 설레고 쫄리기 마련인데, 그 때마다 나는 내가 바로 최고의 해결사다 하는 마음으로 임한다. 나는 당신의 상담사고, 해결사고, 컨설턴트입니다! 자신감 없는 사람은 첫인상이 못미더워 보이니까 자신있게 갑시다.
디자이너들은 중간 과정을 자주 공유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한 결과물의 모습이 있고 그 정도의 퀄리티가 나오기 전에 공개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주는 '원래 일을 맡은 사람이 외부 인력에게 작업을 맡기는 것'이다. 내부 직원이라면 지금 어디까지 됐는지 바로 상황 보고를 할 수 있고, 변경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지만 우리는 외부 인력이다. 그래서 두세번 중간 공유하며 애자일 프로세스를 따르는 게 좋다.
외부 인력이기 때문에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얘가 재택 근무라서 뺑뺑 놀다가 일 안하는 거 아냐? 내가 디자인 모른다고 막 설렁설렁 하는 거 아냐?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클라이언트가 이상한 게 맞다. 하지만 경력있는 전문 프리랜서 아니고 대학 새내기라면 충분히 갑님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연락했을 때 씹지 말고 바로바로 받고, 잠수 타지 말고 (잠수 타다가 납기일에 나타나 결과물 띡 보내는 사람도 봤다) 내가 이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자. 클라이언트를 안심시키지 않으면 계속해서 나를 독촉할테고, 잘 되고 있는지 물어보면서 압박할테니 나를 위해서 클라이언트와 연락을 잘 합시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외부 인력이기 때문에 놓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미팅을 할 때마다 회의록을 써서 공유하곤 했는데, 미팅 끝난 그 날 바로 회의록을 메일로 보내면서 1차적으로 나의 성실함을 어필하고(ㅋㅋㅋㅋ), 우리가 협의한 내용이 이게 맞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하곤 했다. 특히 브랜드 컨셉 같은 경우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아서 엇나가기 쉽다. 예를 들어 세련되고 우아한 여성 패션 브랜드, 타겟층은 커리어 우먼이라고 해놔도, 클라이언트는 버버리 같은 명품을 생각할 수 있고 디자이너는 아페쎄 같은 브랜드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드 보드 짜고! 텍스트로 정리된 협의 내용을 공유하는 게 좋다. 이건 작업자가 나중에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도 중요한데, 최종 결과물에 대해 클라이언트가 거절해도 그 때 우리가 이렇게 협의하지 않았냐, 따질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 중요해서 할 말이 없다. 나는 종종 어기곤 했는데(종종이 아니라 좀 많이... 죄송합니다...) 빡센 곳은 진짜 FM대로 계약 파기할 수도 있고, 전체 금액을 다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납기는 생명!
사실 내가 데드라인을 어기건, 잠수를 타던 실력이 개쩌는 디자이너라면 외주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지인을 본 적이 있고, 내가 클라이언트라도 (시간과 돈이 충분하다면) 그런 사람을 고려해볼 것 같다.
외주를 잘 받는 마지막 팁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와 이력서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디자인 포트폴리오 정리하기 참고) 나는 세미나나 워크샵 가면 항상 개인 명함을 돌리곤 했는데(예,, 제가 좀 관종입니다) 거기에 내 포트폴리오와 SNS주소를 넣어 내가 어떤 스타일의 작업을 해왔는지 방방곡곡 소문냈다. 이 정도로 홍보해놓으면 외주 맡겨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생각이 나게 된다. (그랬길 바란다 하하) 나중에 좀 외주를 많이 받을 수 있게 되면 유사 분야를 몰아서 받는 것도 좋다. 나는 식음료 쪽 브랜딩 작업을 많이 해봤는데, 그러다보면 같은 식음료 분야의 다른 외주를 받기가 쉬워진다. 이미 관련 작업 해본 사람한테 맡기는 게 더 안정적일테니.
저는 이제 외주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슬프지만 여러분의 외주 작업에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