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덕질했던 디자이너들
학부 시절 1년 정도 한글 타이포그라피 연구회(소모임)활동을 했다. 처음 한글 레터링에 관심 가졌던 것은 진부해보일 수 있지만 김기조 디자이너 덕분이다. 그게 벌써 5~6년 전인데 당시 한글 레터링이 대부분 영화 타이틀에 국한되어 있었고 캘리그라피 위주로 이뤄지다보니 김기조님의 작업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참신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레터링의 기본은 심미성과 가독성인데, 둘 다 잘 챙기시는 김기조님 작업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한글 레터링은 그 자체로 임팩트가 큰 그래픽이다. 레터링 하나만 박아도 굉장히 돋보이기 때문에 관심의 끈을 놓기 어렵더라.
현재는 UI 디자인을 하고 있어 레터링할 일이 거의 없다보니 더더욱 수용자의 입장에서 멋진 작업들을 모아두고 감상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디자이너분들의 작업들과 한글 편집 디자인 레퍼런스를 어떤 식으로 찾아왔는지을 소개하려한다. 레퍼런스 공유긴 한데 나의 덕질 히스토리에 가까운 글.
이름 만으로도 설레는 이재민님,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장점을 그대로 살려 포스터나 브랜딩 작업을 하시는데, 아주 무겁지 않게 탁월한 색감과 구성으로 디자인하신다. 졸업 전시 준비할 때 참 많이 봤고, 기준처럼 삼고 (목표는 높게높게ㅎㅎ) 작업했다.
이재민님의 꾸준한 작업을 존경하기도 하지만 그의 안목과 조형감은 너무나 부럽다. 한문과 한글을 같은 선상에 놓긴 어렵지만 둘 다 네모꼴 안에 배치할 수 있는 조합형 글자의 성격을 띄고 있고, 알파벳보다 곡선과 직선 활용이 좀 더 규칙적이다보니 그래픽적으로 발산할 요소가 많다. 이재민님 작업은 내용적으로, 시각적으로 밸런스가 훌륭하다. 내연과 외연이 일치할 때 쾌감이... 최근 해외의 여러 포스터 어워즈들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시고 계신다.
저런 과감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구현 자체로만 보면 아주 복잡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작업인데 대담하게 놓인 큰 면, 배경에 얹는 질감들이 멋지다. 이런 작업들보면 내가 너무 디테일에만 빠져서 힘과 균형을 놓치는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보통은 형태 자체를 이름답게 빚어내지만 컨셉에 맞게 파편화하고 조각내는 것도 효과적이다. 소금 꽃이 핀다는 6년 전에 실제로 본 작업이고 너무 좋아서 아직도 내 책상 벽에 붙어있다. 소금의 컬러와 형태(흰색 사각형)을 꽃처럼 흩날리게 무작위적으로 패턴화한 것이 정말 직관적이어서 충격먹었다. 6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작업. 이재민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다. 빠르게 변하는 디자인 트렌드 사이에서 이런 직관성과 변하지 않는 시간성... 으아!
전용서체는 궁극의 브랜딩이라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는다. 본문용 서체보다는 매력적인 타이틀용 서체를 자주 만드신다. 이런 면에서 이재민님의 성실함과 작업 속도, 효율성에 놀라곤 한다. 레코드 페어와 건축 신문의 경우, 수 년간 매해 조금씩 변형하여 작업하시는데 그 꾸준함도 멋지다.
디자이너가 사회적인 활동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디자이너라 생각한다. 신인아 디자이너님의 행보가 언제나 멋지고 기대되는데, 최근엔 우유니게 디자이너님과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을 만들고 관련 활동을 하시더라.
현실탐구단의 활동을 기록한 책. 신인아님은 내용을 책의 구조와 레이아웃, 재질 자체에 반영하신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챕터별 간지를 크기가 다른 표지 종이로, 별색 인쇄하여 스프링 제본했는데 내지의 레이아웃도 멋져서 나오자마자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매번 적당한 두께의 종이를 사용하셔서 인쇄소 갈 때마다 레퍼런스로 들고 다니기도 했다.
사진도 컨택스트에 맞게 잘 찍으시고, 대체로 서체를 담백하게 잘 쓰신다. 전통적인 레이아웃보다는 변칙적인, 자유로운 레이아웃인데도 불구하고 가독성 높고 정갈한 인상을 준다.
나는 최대한 직관적이고 단순한 걸 좋아하는데 신인아님은 특히 여백을 잘 살리시면서도 위트있는 그래픽을 잘 활용하셔서 레퍼런스로 많이 참고했다.
신덕호님을 알게 된 것은 파주통신 무가지를 통해서였다. 과감하게 한 곳으로 모이는 글자가 정말 단순하면서도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구조와 레이아웃 실험을 많이 하시는 것 같고 편집 디자인에 대해 관념을 해체해주신다. 가끔 내가 너무 안전한 레이아웃만 고집하지 않나 생각할 때 들여다 보곤 한다.
여백을 시원하게 쓰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소통해야하다보니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지나쳐 요소를 꽉꽉 채우거나 디테일을 파느라 전체적인 균형을 놓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신덕호님은 적절하게 힘의 대비를 유지하면서도 파괴적인 레이아웃으로 새로움을 선사한다.
이런 작업은 요즘도 유효한 트렌드인 것 같다. 보통 타이틀은 글자 수가 적고 본문은 많은데 내용의 틀을 깨고 긴 글을 메인 그래픽으로 삼는 경우.
내가 생각하는 명작. 책과 바다 사이라는 제목을 이렇게 잘 반영하는 그래픽이 있을까. 페이지의 결을 물결처럼 표현하고 중앙을 비워버리는 과감함. 심지어 책, 바다, 사이 라는 키워드를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줬다.
너무나도 위트있고 직관적인 디자인. 볼 때마다 쉬운 접근 방식으로 영리하게 잘 풀어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러스트도 잘 하시고 컨텐츠 기획력도, 실행력도 엄청나시다.
유니게님은 특히 볼드한 타입과 그래픽을 과하지 않게 잘 사용하신다.
해시태그를 글 쓰는 손으로 엮어서 표현한 그래픽. 저런 직관적인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우유니게님이 디자인한 책은 거의 다 구입했는데, 디자이너님 본인도 레이아웃과 서체, 책의 외연을 다양하게 시도하시더라.
디자이너의 사회적 활동을 강력하게 잘 보여주시는 선례라 마음 깊이 동경한다. 그래서인지 직관적인 그래픽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장인정신으로 판다기보다는 최초의 아이디어가 참신하신 편. 적당한 완성도와 신박한 아이디어가 만나 좋은 아웃풋을 내신다.
디자이너의 정치적인 행동을 제대로 보여준 좋은 예시. 전통적인 한글 레터링은 아니고 최근의 영어권 레터링을 많이 차용하는 듯하다. 트렌디하고 세련된 느낌이라 자주 본다.
여기까지 나의 디자이너 덕질을 소개하고 그 외의 편집 디자인 영감을 어디서 찾는지 정리해보려고 한다. 주로 독립출판서적과 관련 전시 혹은 행사들을 다음 글에 정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