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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13. 2019

15. 소설가 김연수의 그와 Y씨

고통이 내 심장을 짓누를 때


  Y에게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고충을 들었다. 누구에게나 우울감이 감기처럼 찾아올 때가 있다. 그 무렵 좀 힘들었다는 말에 잘 이겨냈느냐고 물었다. 담담하게 답하길, “이겨냈다기보다는 뭐 시간이 지난 거지.” 우리는 조용히 미소를 주고받았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동갑내기 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는 강의가 끝나서야, 또 다른 친구는 어린 늦둥이를 남편에게 맡긴 뒤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동을 키우는 나와 다르게 둘 다 다둥이 엄마들이다. 얼굴이 좀 상한 친구에게 안부를 먼저 물었다. “어휴, 말하기도 싫어”라는 말로 시작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말하기도 싫을 일들로 힘든 시간을 보낸 뒤였다. 또 다른 친구가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마음이 힘들면 무조건 걷는다 했다. 비도 미세먼지도 그녀의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떤 날에는 세시간 가량 걸어 마트에 다녀왔다는데... “걷는 김에 장도 본 거지. 내가 무슨 짓을, 싶었는데 그래도 기분은 나아지더라.” 나도 질세라 그간의 사정을 토로했다.

  영화 노팅힐의 한 장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불쌍한 승자를 꼽는 자리도 아니었고, 승자가 차지할 마지막 브라우니도 없었으나. 대신 초코해바라기씨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김연수 작가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는 외상후장애로 불면증을 앓는 사내가 등장한다. 그는 거대한 코끼리가 나타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선별한 지인들과 한밤의 산책을 시작한다. 여동생, 절친, 동창, 어린 시절의 친구, 그러다가 닥치는 대로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들에게 한밤의 만남을 요청한다.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응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에, 그냥 걷는 일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생면부지의 Y씨. 그녀는 암투병을 그만두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더 오래 생존하게 됐다고 했다. 어느날 밤 그들은 산책하던 중에 시위현장 앞에 멈춰 선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경찰들과 그 뒤에 대기한 살수차, 버스와 담벼락의 틈새를 막고 선 또 다른 경찰들, 그리고 그들의 머리맡을 지나가는 바람과 함성과 고통... 그들의 고통을 형상화한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또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것들을" 두 사람은 보고 또 본다.


  산책을 통해 그녀가 완치된 것도, 그가 코끼리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는 일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특정 동물들로 비유되는) 저마다의 고통과 함께 걷는 일. 영영 이겨낼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닥쳤을 때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같이 걸을 수 있는 이, 같이 걸으며 어떤 풍경 속에 함께 시선을 둘 수 있는 이일까. 비록 각자의 고통을 바라볼지라도.





  참, 그날 우리의 결론은 한 해가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는 것, 다음 해는 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것.


  시간의 반복적인 순환에도 다시금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건 그 연속선에 마디가 있고, 마디마다 시작과 끝이 새로 주어진다는 착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해내는 일은 얼마나 많은지...


  새해에의 감흥은 없다. 최근 몇 년간 그러했듯 특별한 의식 없이 여느 날처럼 마지막 날과 첫날을 보냈다. 그저 휴일이었기에 온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을 뿐. 영화는 나란히 앉아 봤으나 책은 각자 원하는 자리에서 떨어져 읽었다. 남편은 낮은 소파를 아이는 1인용 테이블을 선호한다. 내게는 책상의 높이가 중요하다. 기록해두려고 사진을 찍는데 표정들이 평온해보였다.

  감사했다.
  뭐 하나 당연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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