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떠나고 싶을 때
역마살이 심하게 낀 사주라 했다. 그 예언을 몸소 실천하려 했는지 독립한 뒤 한곳에서 2년 이상 정착해 본 적이 없었다. 2년차 징크스를 이기지 못했던 거다. 그게 일이든 학업이든 취미든 간에 좀 알만 하면 쉽게 지루해졌다. 그럴 때면 근무처를 바꿨고 유학을 떠났고 관계를 끝내야 했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랬던 사람이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는 근 십년을 한 동네에서 하나의 일에 몰두하며 지내고 있다. 그 옛날의 나는 낯설기만 하다. 새로운 시도 속에서 생의 활력을 찾던 이는 온데간데없고, 시도를 성가셔하다가 종내는 두려워하는 이로 나이들고 있다.
가끔 자신에게 묻는다. 진짜 삶을 어딘가에 방치해둔 채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내가 간과하고 놓치는 생의 의미들이 여기 아닌 저기,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대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다가도 깊게 잠이 든 아이를 바라보면 엄마로서 불온한 생각을 하는 듯하여 쓸데없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역마살은 무슨... 나는 깊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지내고 있었고, 마음이 황량해진 날이면 유독 나무 그리기에 몰두했다. 하나같이 자화상 같았다.
하지만 <랩걸>의 저자, 호프 자런은 나무들도 여행한다고 했다.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나무가 긴 겨울 여행을 떠나는 대목을 읽는데 당혹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동요했다.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보며 저자의 말을 실감한다. 아이라는 세상이 내게 열린 순간부터 매일같이 그곳을 거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계는 확장되고 나와 남편만 알던 그곳이 이제는 다른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중심지에서 밀려나 변두리를 향하고 있다.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으나 필연적으로 그 세상을 떠날 날이 올 테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이 때문에 멀리 이동하는 일이 많겠다는 예언도 들었다. 그때 내가 떠올린 건 맹모삼천지교였으나 맹모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띤 내 모성과 가정경제규모를 돌이켜보며 콧방귀 뀌었을 뿐.
이제 나는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한다.
시간을 통한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벌어진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가 <관찰의 인문학>에서 주장한 대로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으므로. 내가 가로지르는 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니까. 일과를 반복하며 지냈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니 일상의 중심은 어느덧 바뀌어 있지 않았던가.
그 시간 속에서 또 하나 달라지는 게 있으니 바로 내면의 풍경이다. 못나고 볼썽사나운 장면을 목도하고 무참해지기도 하나 때때로 무덤덤하게 지나친다. 그건 그것대로 이해할 만하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긴 겨울 여행에 대비하는 ‘경화’ 과정은 나무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나란 인간의 윤곽을 시간이라는 끌이 다듬어간다고 생각하면, 꼭 어딘가로 떠나야지만 나를 찾게 되는 건 아닐 성 싶다.
나이를 먹는 게 썩 유쾌하진 않지만 어쨌든 시간에 마디가 있어 감사하다. 그 마디마다 숫자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올 한해가 언제고 돌아가고 싶은, 아니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그런 공간이 될 수 있기를.
이건 신이 돕지 않고서는 안될 일이므로 1) 일단 열심히 기도하면서 2) 언제 되돌아가도 그 세부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도록 매일의 시간을 선명하게 새기려한다.
그게 올해의 내 사소하고도 원대한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