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을 지켜야 할 때
요즘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p258, <다시, 피아노>)
2015년 늦봄을 생각하면 비트겐슈타인이 떠오른다. 천장이 아주 높고 두 벽면이 거의 유리창으로 뒤덮인 곳에서 거의 한달에 거쳐 그의 평전을 읽었다. 책에서 시선을 들면 곧 닥칠 여름의 전조가 창밖으로 나날이 짙어져 가는 게 보였다.
마음이 힘들 때면 습관적으로 행하는 게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주 두툼한 책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삶이 통째로 들어가다시피한 책이나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려운 책을 붙들곤 하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고 나면 어느덧 그 시절이 끝나 있곤 했다.
그러니 읽고 있던 책의 특성으로 보아 2015년의 한달도 쉽지 않은 시기였던 게 자명하다.
흥미롭게도 내가 무엇으로 마음고생을 하였는지는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시절의 독서노트라든가 일기를 찾아보면 어휴, 하며 진저리를 칠지도 모르겠으나, 기록으로 기억의 구멍을 메꾸지 않는 이상, 이제 나는 그 시절을 비트겐슈타인으로만 기억할 뿐이다.
기억을 기억으로 덮는달까.
매일같이 자신을 휘몰아가는 일과 관계에 마냥 휘둘리다가 어떤 순간이 찾아온다. 전에 보지 못한 경계가, 그 경계를 일러주는 '선'이 느껴지는 거다. 이 선을 넘어가면 회복하기 어렵겠구나, 어쩌면 망가질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에 적신호가 켜진다. 그 경계 너머로 떠밀려가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묶어들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런 순간이 살면서 한번쯤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의 고백이 다양한 경로와 형태로 들려오곤 한다. 그 담담하고도 절절한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 같다. 위태로이 무너지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듯이. 노를 저어야할 때 노를 내려놓고 자신이 놓인 풍경을 본다던가, 타인이 요구하는 나의 쓸모보다는 내 영혼이 요구하는 나의 쓸모를 고민해보는 것이다. 고민하라는 요청 앞에서 생각을 멈추겠다고 다짐해본다든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딴짓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달디 단 잠이 더 필요한 새벽, 누군가는 매트를 깔고 앉아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물을 잡고 물을 가르며 필사적으로 나아간다. 혹은 수행자의 태도로 라틴어의 문법과 희랍어의 어휘를 익히거나, 오래된 러시아 소설을 정성들여 필사한다.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정해놓고 2년이고 3년이고 몇 시간씩 몰두할 수도 있다. 아니면 365일, 하루 20분이라는 규칙에 자신의 마음을 묶어놓을 수도 있다. <다시, 피아노>의 저자 앨런과 그를 쇼팽의 발라드로 인도한 택시 운전사 게리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 모든 것이 게리로부터 비롯되었다.
- <다시, 피아노>의 첫 문장.
십년간 매일 12시간씩 택시를 몰았던 남자가 있었다. 어느덧 택시 사이즈로 축소된 세계에서 쳇바퀴처럼 굴러가다가 마흔아홉이 되던 해에 우울증을 진단받고 만다.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는 아파트 벽 너머로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소리를 듣는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얽어매는 우울에서 벗어나게 할 뭔가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그것이 피아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생각한다. 그렇게 다시 피아노를 시작한다. 게리의 사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마추어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점차 회복하던 게리는 음악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경험을 맛보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인 유대인 피아니스트 슈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장면에서였다. 게리는 음악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 뒤로 '2-3년에 걸친 기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쇼팽의 발라드를 연습한다. 발라드는 슈필만의 목숨을 구했고, 종내는 게리의 인생을 구한다.
"제가 보기엔 말이죠, 쇼팽은 발라드에서 스스로의 인생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쇼팽이 이 곳을 쓴 건 20대 초반 시절이었죠. 위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쇼팽 역시 행복을 갈구하고 결국엔 낙심하고 그런 과정을 오가는 것 같단 말이죠. 발라드만 해도 (...) 어떻게든 무거운 분위기를 떨치려고 노력하다가 중간 부분에는 잠깐이나마 행복의 흔적이 스쳐가지만 종내 우울한 첫머리의 분위기로 돌아가버리고 말죠. 그렇잖습니까? '행복해지고 싶다'고 고함을 내지르지만 쉽게 내지 않죠. 마지막에는 '결코 삶이 나를 짓누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지고요. 코다에 접어들면 '내가 삶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는 느낌이 지배합니다. (...)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끝부분에서 희망을 느끼게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있잖아, 인생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나쁠 것 없는 거라고'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아요." (p106)
<다시, 피아노>는 한 택시 운전사에게서 영감을 받은 <가디언>지의 편집국장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시기에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를 배우고 연습한 기록이다. 그는 하필 그 해에 기록적인 특종사건들- 어산지의 위키리스크 외교 문건 보도 사건과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전화 도감청 사건 등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고 쇼팽의 발라드 정복이라는 엄청난 일을 꾀했다.
대체로 매일의 임무가 뒤따르는 거창한 계획일수록 작심삼일이 되기 쉬울뿐더러, 주변상황이 예측하지 못한 형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개인적인 포부쯤이야 가장 먼저 희생시키기 마련이니, 나름 가치 있는 시도라 해도 다음으로 미뤄지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우려 섞인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집요하고도 전방위적으로 쇼팽의 발라드를 완성해나간다. 언론인의 취미생활은 이런 양상으로 전개되는 건지, 혀를 내두르게 하는 그 편집광적인 과정을 그는 여실히 보여준다. 피아노 앞에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관련 전문가들- 다양한 배경의 피아니스트들, 저술가, 음악 평론가, 신경뇌과학자 등을 만나 피아노 연주에 관한 지적 호기심을 탐구해나간 것이다.
자는 시간 빼고 풀가동되는 듯한 그의 일과를 보면 하루 20분도 가당찮아 보인다. 그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지면에 대놓고 조롱하는 언론인들도 있었다. 왜 하필 피아노인가. 그가 피아노를 치지 않고 테니스나 골프를 쳤다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일기에 분통을 터뜨리며 고백한다. 피아노여야 한다고. 아드레날린 신경이 폭주할 것 같은 편집국에서 그가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바로 피아노 덕분이었다.
“출근 전 20분을 피아노 앞에서 보낸 날은 뇌의 화학 반응이 달라진 것만 같은 강력한 느낌을 받곤 했다. 연습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마치 내 뇌가 ‘안정’된 것처럼 느껴졌고, 앞으로 열두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모두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의 원천이 정확히는 화학반응이 아니라 신경회로망의 재편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p19)”
누군가에게는 꼭 그것이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하필 피아노이거나, 하필 '피아니스트들에게 지옥을 맛보게' 한다는 쇼팽의 발라드 G단조이거나.
내게 그것은 책이었다. 더디게 이야기의 고개를 넘다보면 고된 일상에서 반세기쯤은 쉬이 멀어지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아마도 훗날 2019년의 늦겨울을 돌이켜보면, 바라건대, 쇼팽과 <발라드1번G단조>를 떠올릴 것이다. 두 명의 열정적인 아마츄어 피아니스트 앨런과 게리, 그리고 앨런이 만난 유수의 피아니스트들, 또한 책 때문에 찾아본 영화 <피아니스트>와 <제5계급>, 유튜브에서 발견한 조성진과 호로비츠의 연주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피아노.
몇년 만에, 조율도 엉망이고 페달도 망가진 피아노 앞에 앉아 더듬거리며 바흐 인벤션 3번을 연습했다. 내 손가락(이 책에 소개된 신경정신병학 교수인 레이 돌란의 말에 따르자면 내 '절차기억')이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쇼팽.
... 쇼팽.
2019년의 늦겨울에 관해서라면, 쇼팽(에 관한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마음의 멱살을 잡고 절룩이며 걷고 있는 이 시절은,
그렇게만 남을 것이다.
"매 여덟 마디마다 목표한 지점에 도달했는지 체크하면서 전진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슈만의 작품은 음악에 푹 빠지는 게 가능해요. 하지만 쇼팽은 달라요. 한순간이라도 냉정함을 잃어선 안 되죠. 슈만과는 달라요. 베토벤은, 오 맙소사, 근래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연습하고 있는데, 정말 개인적인 음악이에요. 베토벤이 느낀 고통과 슬픔이 면전에 확 다가오는 것만 같다니까요. 반면 쇼팽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아요. 아주 아름답게 마감된 완성품이지만, 그 속에서 작곡가가 느낀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는 건 쉽지 않아요. 모든 감정이 이미 한 번 걸러져 담긴 것만 같아서요."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