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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05. 2019

18. 비평가 존 버거

침묵해야 할 때


친구 Y에게서 다가오는 수요일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요가강사로 일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은 센터 휴관일이다. 그녀의 문자를 받고서야 그날이 둘째주 수요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날짜감각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닌가.

돌아오지 않는 건 현실감각인지도 모른다.   

뭔가에 사로잡힌 듯이 살아가는 나날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그날은 힘들겠다는 답문을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내가 그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잘 알았고, 그걸 막아야만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일단 내뱉으면 언제고 후회할 이야기였다. 그렇게까지 바닥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나, 지금의 나는 감정이 통제되고 있지 않으며 이 감정들을 추스리느라 아주 모질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의 굳은살을 새겨놓는다면, 나란 인간은 망가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빚어졌다. 그걸 때때로 신에게 따져보지만, 이제 와서 신도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내 모습 그대로 족하다고 신이 선포하였으니, 어떤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어떤 때는 억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올 겨울 들어 이렇게 만나자는 청을 거절하는 일이 벌써 여러차례 되풀이되고 있다.


또 다른 친구 S는 서운해하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때론 우리 각자의 문제가 전혀 상관없던 이의 미미한 관심이나 아무 연관 없던 사건으로부터도 영향받는 것 같다고, 그러니 들어주겠다고, 어느 순간이든 네가 손짓하면 달려갈 친구가 여기 있다는 걸 잊지 말아달라고... 


고마운 친구다. 그녀의 다정한 마음은 오래 기억해야겠다고, 언젠가는 그 고마움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S를 만나지 않았다.


예전의 나는 이 정도로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친구에게 달려가는 사람이었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를 내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나쁜 인간이었다. 친구란 그런 것이지, 아픔을 나누는 게 진정한 관계 아니던가. 아니다. 그 어떤 아픔도 '적정선'을 지키며 나누는 게 예의이고, 그 어떤 가까운 관계에서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 나는 그걸 몰랐다. 몰라서 못했다고 이제와서 변명해 본다. 그런 내 행동을 인지한 것은 내가 누군가의 쓰레기통으로 알뜰살뜰 활용된 뒤였는데, 그녀와 함께한 시간 내내 역지사지의 지혜를 고통스럽게 체득했다. 그 통렬한 깨달음이 그 사람이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다.

 



친구에게 달려가는 대신, 오늘도 나는 책을 펴들고, 글을 쓴다.

필사적으로 읽고 쓰는 중이다.

 



'오늘의 책산책'의 주인공은 다양한 직함을 가진 이다. 

미술평론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그의 이력과 저서들만 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존 버거 님. 





<작가라는 사람2>는 엘리너 와크텔이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 22인의 목소리(그리고 이야기)라는데, 2권에 실린 작가들 태반이 낯설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읽다가 종종 딴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존 버거가 ‘이야기에 맞는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논하는 대목이 있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이야기를 정당하게 하는) 목소리의 발견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침묵이었다.


“이야기에서는 말해지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내용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이야기는 침묵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목소리는 자기만의 침묵을 가지고 있어서 말하지 않는 내용을 뛰어넘습니다.(p312)”



소설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그렇다. 삶도 기본적으로 이야기이므로.

어떤 사람(혹은 어떤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그것이 그 사람(그 사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의 열쇠는 차마 말하지 못한 것, 혹은 부러 숨기려 하는 것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버거의 흥미로운 주장은 계속되었다.


“농민의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는 농민의 경험에서 나오는 목소리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목소리는 어느 정도 바뀔 수밖에 없어요. 어느 정도는 모두 농부의 목소리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것을 배워야 했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그는 농부들의 발화에 나타난 접속사들을 비교했는데, 이십여년 간 시골에서 살면서 농민들이 ‘하지만’을 거의 쓰지 않고, 대신 ‘그리고’를 쓴다는 걸 주목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돼지 도리스를 좋아했고 지난 1월에 도리스를 죽였어.”
버거의 설명은 이렇다. ‘하지만’은 “지적 담화에서 쓰는 단어이며 대립의 의미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농부의 목소리에서 자주 들리지 않았다는 것.


흥미로웠다. 여태껏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지적 담화’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로 그러했다. 이 부정의 접속사는 한번 더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의미한 항목들, 그것들을 단순하게 연결시킨 고리를 끊어서 그 관계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돼지 도리스를 좋아했지만 1월에 죽였다”고 말한다면, 더는 사실만을 단순하게 전하는 발화가 아니게 된다.


‘좋아했다’와 ‘죽였다’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좁혀지지 않는 넓고 깊은 틈새가 생겨버린다.

하지만, 이런 일들(좋아했다와 죽였다)을 반복하는 삶이라면, 우린 어떤 발화를 선택하게 될까.
봉합할 수 없는 그 틈새를 기꺼이 만들어 견디려 할까. 아니면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생각이 개입하지 않도록, 무덤덤하게 열거하게 될까.

골똘히 생각했다.
내 발화에 대해.
내 ‘그리고’와 ‘하지만’에 대해.
혹여 ‘그리고’를 자주 쓰게 된다면, 나는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는 대립을 묵살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번 더 생각하지 않도록 다음의 사건으로 건너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존 버거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친구들을 당분간 만나지 않기로 한 건 옳은 결정처럼 보인다.

현재 내 발화는 그저 사건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들의 단순한 병렬에 그칠 테니까. 'A가 일어났고, B가 일어났고, C가 일어났고, D가 일어났고, 고로 나는 미치고 팔짝 뛸 것 같다', 이런 식일 거다. 감정의 홍수에 허우적대거나, 혹은 굳은살투성이가 되어 강팍해진 채. 오로지 내 자신을 방어할 목적으로 말이지. 내 이야기에는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할 '하지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그러니 침묵해야 한다.

침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자발적 고립에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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