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수리공 김정선
부천역 북부광장 근처 카페에서 한 커플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난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보다 먼저 일어선 손님들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너무 까매서 투명해 보일 지경인 아메리카노를 앞에 놓고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었다. 새해를 이틀 앞둔 세모의 밤이었다. 아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으니 하루 전이라고 해야 맞겠다.
-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의 첫
눈을 사로잡은 건 책의 제목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그러게. 속으로 맞장구치듯 제목을 읊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제목 때문에 책을 집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류의 에세이가 아닐까 했다.
회색 커버에 단출한 선 몇 개로 그려진, 등이 굽은 남자를 잠시,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오래 들여다봤다. 저 낯익은 모습이라니. 한여름 웃자란 잡초 같은 긴 머리가 등을 덮고 있다면, 내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그림에 시선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책을 등지고 싶어졌다.
그럴 때가 있다. 뭔가에 마음이 끌릴수록 오히려 외면하고 싶어진다.
작가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김정선 작가라면, <동사의 맛>,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작가 아니던가.
게다가 리뷰소설이라니.
소설리뷰도 아니고 리뷰에세이도 아니고, 리뷰소설이라니.
어쩌면 짐작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망설임을 끝내고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읽기 시작한 이 책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근사한 책이다.
이런 독특한 구성과 색깔을 지닌 책을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다. 책은 소설 속 여느 장면처럼 시작된다. 새해를 앞둔 어느 겨울밤, 카페에서 셰익스피어를 읽는 '나'와 장기적출을 운운하는 옆자리 젊은 커플. '장기적출커플'이 나누는 대화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다 어느새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화자 '나'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과 장면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폐부를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 글은 리뷰인가.
하지만 이 모든 중심에는 '나'의 이야기가 있다. 여러 겹의 허구 속에 몸을 도사린 '우울'이 있다. 십년이 넘도록 이어진 간병 생활, 오랜 지병, 잠시 내려놓은 생업, 이런 맥없는 단어들로만 '나'의 우울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지닌 우울과 고통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매만져 재구성하는 것처럼 속절없이 느껴진다. 언어를 넘어서는 일만 같다. 나는 다만 빈약하게나마 이 글을 읽는 내 마음을 말하고 싶다. 내가 기대치 못하게 받은 위로를 고백하고 싶다. (아, 정말이지 이런 제목의 책에서 이런 위로를 기대한 적도, 받아본 적도 없었다.) 나 홀로 어둠 속에 남겨졌다 생각했는데, 어딘가에서 누군가 더듬거리며 다가와 작은 등 하나 손에 쥐어주고 간 듯했다. 그래서 모두가 잠든 밤이면 그 작은 빛에 기대 천천히 나아갔다.
책 중반부쯤에 가서야 '내'가 셰익스피어를 왜 읽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시작은 <베니스의 상인>의 첫문장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안토니오의 탄식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탐독하게 된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햄릿, 헨리 4세, 오셀로, 십이야,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리어왕, 템페스트...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빼든 책의 첫 문장을 읽고 나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굳어버리는 걸 느꼈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1막 1장의 첫 문장이자 안토니오의 대사.
아마 그때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으리라.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라고 중얼거리면서. (p106)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그저 ‘잘 읽어낸’ 것만으로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를 깊이 애정한다 해도 이렇게 쓰지 못할 것 같았다. 머리와 마음 말고도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건 어쩌면 ‘삶’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은 한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고스란히 관통한 뒤 남은 결과물이 아닐까.
바꿔 말해보자. 이 책은 새로울 것 하나 없다 여겼던 익숙한 희곡들이 어떤 이의 한 시절을 통과한 후 갖게 된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읽고난 뒤에서야 비로소 셰익스피어가 간절히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전과 다른 햄릿을, 다른 오셀로와 다른 맥베스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읽게 될 셰익스피어는,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절의 나'와 조우할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작가가 만난 이들과는 다를 성 싶다.
어쩌면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에게는 탄식하는 안토니오가 다가왔고, 그렇게 셰익스피어와 그가 창조한 인물들이 찾아왔으나, 내게는 다른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찾아왔는지도...
때를 놓치지 말고 문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안으로 들이고, 그렇게 한 시절 함께하는 것. 지금 내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 같다.
인간이란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 <여인숙 The Guest House>, Jalal al-Din Ru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