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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20. 2022

20. 낭만적 은둔의 역사가 데이비드 빈센트

은둔의 시간이 필요할 때 


 


나의 부모는 가난한 노동자는 아니었으나 고단한 노동이 밤늦은 시간까지, 그러니까 납품일에 맞춰 할당된 하루치 노동을 끝내고 가게를 찾는 손님의 발길 또한 끊기는 순간까지 이어지던 삶을 오래 살았다.


그들에게 ‘평화와 고요’의 순간은 언제 찾아왔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어렵지 않다. 부모는 쏟아지는 노동의 시간 마디마다 자기만의 시간을 단호하게 떼어냈다. 엄마에게는 수요일 저녁 두시간과 금요일 오후 두시간, 그리고 온전한 일요일이었으며 아버지에게는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저녁까지의 시간이었다.


엄마의 영적 생활과 주기적으로 바뀌었던 아버지의 여가생활을 ‘은둔’의 카테고리에 넣어 본 적은 없다. 신앙은 신과의 단독적 만남을 기본으로 하지만, 영적 수행을 위해서는 골방과 교회라는 상반되는 공간이 모두 필요하며 엄마는 천성적으로 사람과 만남을 좋아했다. 엄마와는 다르게 아버지의 기질은 내향적이었고 그가 선택한 ‘독서, 난 키우기, 골동품과 수석 수집, 밤낚시’ 같은 여가는 그걸 누리는 당사자로 충분했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사람과 만남을 좋아했다. 비록 자신의 즐거움을 공유할 극소수의 지인에 한정되었을지라도.




역사가 데이비드 빈센트의 <낭만적 은둔의 역사>는 18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영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홀로 시간을 보냈는지에 관한 역사서다.


‘낭만적’이라는 수사에 낚였는데, 은둔도 은둔의 역사도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1장 산보의 역사는 흥미로웠으나 짧아 아쉬웠고, 2장 각종 여가 활동의 역사와 그 뒤로 이어지는 수도원과 감옥에서의 은둔(이라 쓰고 감금이라 읽자)에서 몇차례나 책 밖으로 탈주할 뻔했다.


산보 ·카드게임 ·우표수집 ·독서의 역사, 노동자 계층 주부들에겐 노동에 불과했으나 중산층 주부에게는 사색의 의미가 덧칠해진 바느질과 원예, 그리고 낚시를 필두로 다양한 여가활동이 간행물 시장의 성장으로 다채로워진 점... 따위는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매력을 지닌 책이었다. 기대와 다르게 흘러 계속 읽어야 하나 뒷부분을 뒤적이다 결국 돌아오고, 딱히 관심 일지 않는 건조한 사료 같아 그만둘까 싶은 순간 흥미진진한 정보며 일화를 선심 쓰듯 건네줘서 또 부지런히 읽었다. 가령, 


‘혼자만의 평화와 고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재원이 요구된다는 것. 


“모든 사적인 것은 정치적이다.(하라리)”


고독의 시간마저 그러했다. 

특정 여가 활동(가령 독서)가 대중성을 갖추는 데도 수세기가 걸렸고, 

마지막 수혜자는 ‘가난한 여성’이라는 것. 

심지어 튼튼한 발만 있으면 되는 ‘산보’조차 그러했다는 것. 

여기에 문화적 정체성(혼자걷기는 영국인·남자답지 않은 일)과 정치성(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긴 산책클럽의 정치적 단체활동), 심지어 정부의 간섭(거리배회 금지, 여성 단독도보 금지)까지 끼여들면 진정한 ‘혼자 있기’는 수도원, 감옥, 혹은 바다 한가운데에서나 누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작가가 한 챕터를 통째로 ‘감금생활’에 할애했나 따위에 골똘하다 결국 마지막 장 ‘디지털 시대의 고독’에 무사히 도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독하고 나니 이 지난한 독서의 진정한 종착지는 내 부모와 내가 머물렀던 (충분히 낭만적인) 은둔의 장이었다.


작가는 말했다.

“은둔은 물리적으로 고립되기,
연결된 채 혼자 있기,
딴 곳에 정신팔기의 세 모습으로 실행된다.”


작가의 말을 받들어 은둔의 테두리를 단순한 물리적 고립만이 아니라 “연결된 채 혼자 있기”와 “딴 곳에 정신팔기”로 확장시킨 뒤 ‘고립, 외로움, 고독’의 세부를 면밀하게 살핀 끝에 나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고립과 외로움을 재정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간을 나는 독서로 버텨내며 ‘고독’의 영역에 안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무탈하게 사춘기를 통과했다. 내 부모가 ‘정신적 은둔’의 시간을 확보해냈기에 그들의 영혼이 노동에 짓이기지 않았던 것처럼.



고된 일과 끝에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이어폰을 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정신적 은둔의 시간 속에 몸을 숨길 수 있다. 밤바다의 침묵 한가운데 고무보트를 띄워놓고서, 밥상에 성경을 올려놓고는 손을 포개고 눈을 감는 것으로, 소설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밀려드는 공포와 서스펜스, 그 미친 몰입감 속에서도, 우리는 “자기만의 에덴동산인 정원을 가꿀 수 있다.(데이비드 빈센트)”


잠시나마.


하지만 그 찰나들이 우리를 숨쉬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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