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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30. 2022

21. 달콤씁쓸한 감정의 작가 수전 케인

삶이 어둑해질 때


어느 저녁 충동적으로 집을 나섰다가 올겨울 고퀄 프리뷰 같은 충격적으로 싸늘한 칼바람에 거의 돌아설 뻔했다. 마음의 즉흥성이랄 게 오랜만에 발휘된 터라 성글게 짜인 가디건을 애써 굳게 여미곤 단골카페를 찾아갔다.


바깥은 매몰차기 그지없는데 실내는 사람들의 온기로 훈훈하고 아늑했다. 그곳은 오후 네다섯시경의 햇빛이 직선으로 찌를 듯이 들어와 저녁무렵에는 서편 창가의 버티컬이 내려와 있기 마련이었고, 각각 다른 형태의 조명등이 낮은 조도의 은은한 주광빛으로 테이블들을 부드럽게 감싸곤 했다. 혼자이고 싶은데 혼자 있긴 싫고, 고독하고 싶은데 고립되긴 싫은 이들이 가까이할 법한 공간에서 각자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진다거나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는데도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워지는, 마음의 자가당착에 빠질 때 나는 이곳을 찾곤 한다. 이곳은 집이 아니며 사랑하는 이도 없지만, 그런 갈망을 일정 정도 해소시켜준다. 해소,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것 같다. 해소시키기보다 지속시킨다. 순간의 느낌으로 사라질 감정을 갈망이라는 형태로 선명하게 인식하고 그 속에 좀더 오래 머물게 된다. 하지만 내가 갈망하는 건 구체적인 공간도, 사람도 아니며, 어쩌면 갈망 그 자체인지 모른다. 갈망을 귀속시키는 대상을 찾고자 하는 갈망. 은연중에 지녔던 이런 모호한 생각은 수전 케인의 <비터스위트>를 읽으며 보다 구체적이고 선명해졌다. 갈망을 이루는 감정, 갈망이 향하는 것, 그 근원과 본질, 그리고 갈망을 갈망하는 일에 대해 거듭 생각했다.


가령,

"고향은 어떤 장소가 아니에요. 고향은 갈망이 있는 방향이에요. 거기에 이르기 전까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결국 갈망은 하나의 거대한 동경이에요." 라는 문장을 만나고,


혹은 C.S.루이스가 표현한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자, 모닥불 타는 내음, 머리 위로 날아가는 청둥오리 떼 소리, <세상 끝의 우물>이라는 책 제목, 쿠블라 칸의 첫 시 구절, 늦여름 아침의 거미집, 내리치는 파도 소리 같은 것에 마주하는 순간 검처럼 날카롭게 찔러오는 열망"을 맞닥뜨리고.


갈망에는 도려내기 힘든 씨앗처럼 슬픔이 단단히 박혀 있다. 이곳에서 저곳을 꿈꾸지만 그곳은 영영 안착할 수 없는 땅이며 아무리 갈구한다 한들 그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갈망은 리베카 솔닛이 <길 잃기 안내서>에서 고백한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의 색"을 띠고 있다. 그녀가 "눈에 보이는 것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 있는 푸름"이라 지칭한, 말하자면 "감정의 색이고, 고독의 색이자 욕망의 색이고, 이곳에서 바라본 저곳의 색이고, 내가 있지 않은 장소의 색이다." 찰나의 빛을 보여주고 닫힌 문 앞에서 나는 그저 다시 열리길 기다리지만 닫힌 문마저 사라지고 다시 어딘가에서 열릴 문을 찾아 헤맨다. 잠깐의 조우로 인한 환희, 혹은 그 가능성에 대한 기대, 막연한 그리움, 간절함 들이 갈망을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그리고 슬픔. 하지만 우울하거나 낙담하고 절망하는 슬픔이 아니다. 얼룩진 마음을 정화시키며 정신을 고양시키고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슬픔이다. 이것을 수전 케인은 '비터 스위트'라 부른다.     


갈망에 대한 갈망을 다시 곱씹어본다. 오래도록 돌보지 않았던 이 마음의 형태를 좀더 선명하게 매만져보자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삶과 존재의 의미를 향한 갈망이라 생각했다. (쓰고 보니 부담스러우리만치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온전함에 대한 갈망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현재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내가 지닌 것들이 아니라 (어디선가 잃어버렸다고 착각하는) 내게 부재한 것들을 찾느라 이곳이 아닌 저곳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이 질문을 맞닥뜨린 이후로 그 '나머지'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고 어딘가에 조각조각  파묻혀 있을 것들을 모아 온전해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도, 삶의 의미도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고.


나는 목적과 의미를 더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산다. 나는 나겠지. 이상을 쫓느라 현생을 방기하지 말고 미지의 나를 찾느라 지금의 나를 방치하지 말자 생각한다. 그렇다면 갈망은? 갈망은 버려졌고 잊혔다.

요즘 나는 살만 한가... 보다. 갈망하는 삶을 되찾기 이전에 그런 포부조차 그걸 받쳐주는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니까. 최소한의 에너지가 채워지자마자 내가 하는 일이란 갈망을 갈망하는 일이라니. 이건 기질상 어쩔 수 없나. 해가 있는 쪽으로 고개 들고 몸을 뻗는, 내게는 그런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시점에 수전 케인의 글을 읽어 좋았다. 전작 <콰이어트> 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이 책에서도 일종의 동류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C.S.루이스가 "어린 시절 이 감정을 느낀 후 남은 평생토록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고, 그 근원을 찾고, 경이로운 그 '찌르는 듯 날카로운 기쁨'에 자신처럼 친숙한 동류의 사람들을 찾으려 힘썼"듯이 그녀도 이 책을 쓺으로써 그와 같은 길을 걸었나 보다. 그들을 보며 기억해냈다. 내가 이런 데서 기쁨을 얻었었지, 내가 이런 사람이라 이런 기쁨이 소중했지... 하지만 이제 시선의 방향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멀리 보고 싶진 않다.

       

올들어 되찾은 것들을 생각한다. 예전만큼의 고양감은 아니지만 여전한 배움과 즐거움을 주는 책들, 몇 개의 오래 빛날 문장들, 매일 오후 세 시의 햇빛과 바람,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일, 때마다 기쁘게 주고받는 안부인사.     


며칠 뒤 온가족이 코다리찜을 먹으러 갔다. 창가자리에 앉았는데 정오의 빛이 그리 거슬리지 않게 식탁에 드리워졌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J가 창밖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 새 보여, 와씨 대박 큰데, 저기 새 봐봐, 너무 큰데 새 맞나, 어 맞네 진짜 새네, 저렇게 큰데 안 보이냐고 주절댔다. 안경을 쓰고 오지 않은 남편은 아예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안경 없이는 내 눈에도 보일 리 없지만 나는 J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노려보다시피 했다. 역시 보이진 않았다. 호들갑 떠는 J만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문득 J의 눈동자 색이 갈색으로 연해진 걸 느꼈다. 단단한 고동색에서 따뜻한 갈색으로. 내가 홀린 듯이 제 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자 J가 눈을 찡긋거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엄마, 내 머리 색깔도 갈변하고 있어.

         

수전 케인은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 주변에 흩뿌려진 신성함의 파편들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이 신성한 빛으로 채워진 그릇이었으나 그 그릇이 깨지면서 흩어져 이제는 신성함의 파편들이 우리 주변에 흩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너무 어두워 그 파편들이 보이지 않고, 또 때로는 우리가 고통이나 갈등으로 너무 정신이 팔려 파편들을 제대로 못 보게 된다."


기질상 '먼 푸름'에 대한 갈망은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삶에 흩뿌려진 빛의 파편들을 찾아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땅도 살피고 싶어졌다.

       

삶에 별빛을 섞어보자.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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