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서성일 게 필요해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빼들고 보니 언제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존 러스킨의 드로잉. 19세기에 쓰인 드로잉 책을 펼쳐들고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이 모습을 남편이 본다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아이방 옆방이 창고가 아니라 방, 그것도 당신 방이라는 거 알지,” 그 당연한 걸 아느냐고 그는 진짜 궁금한 듯한 표정을 하고서 며칠 전에 물었듯이 또 물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방을 제외한 집안 곳곳을 종종 배회하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그 방에 머물지 않은 지 일년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간다. 오늘도 방문은 닫혀 있다.
베란다 앞에 서서 책장을 넘긴다.
"선 하나라도 진심과 인내를 담아 그으라."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이해하고 재현하려는 목적에만 집중한다."
"당신의 눈을 이용하라. 보이는 대로 그리도록 노력하고 누군가...훈수를 두더라도 아예 무시해버리라."
"날카로운 눈으로 당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성찰하고 문제를 해결하라."
플로베르는 모파상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사물을 "오래 그리고 주의깊게" 생각하라. 그러니까 나무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과도 닮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앞에 머무를 것.
이는 현상학적 방법론과 맥을 같이한다.
후설은 현상을 묘사하려면 먼저 그가 '에포케'라 명명한 현상학적 제거가 필요하다 했다. 즉 대상에 들러붙은 '개념적 방해물들', 관습적이고 편협한 이미지, 주입된 고정관념, 심지어 감상적 기억까지 일종의 괄호 안에 묶어 놓고, 그저 사물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글을 쓸 때 이미지에 집중할 것을 강조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일종의 방향이 제시된 듯한 느낌이 올 때까지.
"그것이 바로 네 생각이다. 그러면 이제 너는 그것을 명확하게 써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 주의깊게 바라보는 것, 어떤 방해물 없이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 말이다.
매해 봄 철쭉을 본다. 그날도 철쭉을 보았다. 남편이 수영장까지 걸어간다길래 따라 나섰다가 홀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내가 시선을 두고 있는 게 철쭉이라는 걸 깨달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을 때가 잦다. 보고 있다가 보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 그래서 빈번하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바로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던 어느 봄날을 떠올렸고, 눈앞의 철쭉이 아니라 사진에 새겨진 흰 철쭉을 보고 있었다. 꽃은 이미 졌기에 눈앞에 펼쳐진 건 초록더미에 불과했는데 나는 몇 미터 가량 흐드러지게 핀 흰꽃더미를, 그것도 몇 해 전의 꽃을 보고 있었다.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물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후설의 은사인 브렌타노는 마음의 '지향성'에 대해 말했다. 마음은 끊임없이 대상을 향해 접근한다. 무언가에 대한, 무언가의 생각. 그럼에도 그 대상의 본질을 비껴간다, 마음은.
내 마음은 더욱 그러하다. 대상에 초점 맞추는 걸 쉬이 포기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적 기억, 대상과 관련된 또 다른 사물이나 현상, 혹은 진부한 감상들로 산만해진다. 그런 자신을 반성하며 예술비평가와 현상학자와 실존주의자가 강권한 것을 실천하자 했다.
그러니까 철쭉을 바라보자.
나는 결심하고 걸음을 멈춰 '보았음'에도 결국 보지 못했다. 내 눈은 여전히 철쭉이 진 자리만을 더듬고 있었고, 그게 철쭉의 본질은 아닐 터였다. 제풀에 지쳐 가던 길을 마저 갔다. 화가와 철학자는 아주 끈질긴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대상을 온전히 보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고 내 눈으로 보는 것, 오래 깊이 보는 것, 그저 그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런 경험이 있긴 있었나, 그게 언제였더라, 생각하다가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갔다.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로. 곤히 잠든 아이가 가장 섬세한 붓질로 그려진 듯한 입술을 천천히 끌어올리던 순간으로. 눈을 감은 채로 옅게 미소 짓는 얼굴,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울먹이는 얼굴, 힘없이 벌어진 아이의 손 안에 내 손가락을 슬며시 끼어 넣었더니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가만히 쥐던 작은 손, 연하고 보드랍고 이렇게 작은데도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의미를 육화시킨 듯한 아이의 손. 이런 것들을 보느라 넋 놓고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