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수선하는 작가 앤 라모트
해가 바뀌자마자 J의 교통사고, 뒤이은 남편의 수술, 퇴원 후 응급실행, 재입원 등의 과정을 겪으며 내 자신과 남편을 위로한 말은 진정한 새해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 이 모든 일은 지난해에 묻어버리고 가자는 것이었다. 입원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설 연휴를 꼬박 병원에서 보내게 되자 이번에는 입춘을 입에 올렸다. 명리학적으로는 해가 바뀌는 기점을 입춘으로 잡으니 계묘년의 진정한 시작은 2월 4일이라고, 봄의 시작이면서 새해의 시작인 날이 저만치 앞에 있다고.
농담조로 던진 말이지만, 이런 소소한 의미 부여는 마음을 다잡는 데, 특히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가짐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 해를 닫고 여는 날이면 저마다 특별한 의식을 찾는 게 아닐까. 언젠가부터 J는 1월 1일로 넘어가는 시각에 새해를 맞이하는 첫노래를 선별하곤 하는데 올해는 우주소녀의 '이루리'를 들으며 Happy New Year를 외쳤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올해 나의 첫 책은 <나쁜 날들에 필요한 말들>이잖아. ...맞다. 지나친 의미 부여도 정신 건강에는 좋지 않다. 뭐 어쨌든 진정한 의미의 첫 책은 아직 읽지 않은 걸로.
사실 1월 첫주에 이 책을 읽게 된 연유는 단순한데 예약대기도서 중 가장 먼저 내 손에 떨어져서였다.
부제는 '단단한 마음을 만드는 25가지 방법'이다. '...하는 ...가지 방법' 류의 책에는 딱히 손이 가질 않는다. 앤 라모트의 책이 아니었다면 표지만으로는 선듯 선택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녀의 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호감 어린 소감들을 들어왔고, 더욱이 좋아하는 이에게 영향을 준 작가였기에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손에 들어온 이 책은 막상 읽어 보니 여러모로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먼저 이상하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몇시간이면 뚝딱 해치울 만큼 에세이는 분량이 작고 평이하다.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책의 부제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만 내 마음이 단단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한참 읽다 보니 '아주 몹시, 훨씬 더' 나쁜 날들에 필요한 말들이었다. 나는 모진 풍랑을 앞둔 사람처럼 움츠러들어선 책을 덮어버렸다. 그저 '보통보다 조금' 나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뿐이며 그런 내게는 아직 불필요한 말들이라 위안하고 싶었을까. 이런 날에는 오히려 유쾌한 읽을거리가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다. 차라리 남편이 얼마 전에 사들인 <슬램덩크 챔프>를 읽던가(276화 중 엄선된 24화 수록, 명장면/명대사 등 액기스만 골라넣었다는데). 하지만 앤 라모트의 첫 책을 이렇게 그만두고 싶진 않아서 다시 펼쳐들었다.
독서의 흐름이 자주 끊긴 이유를 하나 더 찾자면, 책의 구성 탓도 있다. 나누지 말아야할 이야기들을 잘게 토막내어 묶었다. 중간중간 한페이지를 다 차지한 삽화와 인용 문장들은 그 자체로 감상할 만하지만 시선을 분산시킨다. 어떤 챕터들은 소제목과 내용이 딱 떨어지지 않는다. 소제목들이 워낙 인상적인 탓에 그걸 염두에 두고 읽게 되는데 내용이 하나의 메시지로 모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원서의 목차를 찾아 보니 구성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중후반부는 장 나뉨을 무시하고 쭉 달렸다. 라모트의 이야기에서 가져온 소제목들은 그 자체로 메시지의 힘이 강했고, '나쁜 날들에 필요한 말들'이 맞다. 목차를 그대로 옮겨 적어 책상을 마주한 벽에 붙여놓고 싶을 정도다.
1. 어쩔 수 없다면 지금 그 자리에서 버텨라
2. 고통을 멀리해봐야 소용없다
3.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운이 좋은 것이다
4. 방향을 잃었다면 하던 일을 계속하라
5. 이길 수는 없어도 노력할 수는 있다.
6. 세상을 정교하게 바라보자
7. 하면 안 된다고 배웠던 것들을 해 보라
8.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질문에 모두 대답할 필요는 없다
...
25. 완전해지기보다는 조각조각 난 삶을 잘 연결하는 사람으로 살자
하지만 이렇게 간결하게 옮겨 놓은 메시지보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25가지 구체적인 지침보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더 오래 기억할 것이다. 자투리 천을 한땀 한땀 이어 만든 조각보 같은 이야기들. 특히 망가진 커튼을 수선하는 에피소드는 정말 좋았다. 삶의 일부가 훼손된 것만 같을 때, 여기저기 볼썽사나운 구멍 투성이에 손쓸 도리 없이 자신이 헤져버린 것만 같을 때 앤 라모트는 내가 무얼 해야할지 일러주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먼저 오늘의 바늘에 당신의 실을 꿰고, 바로 지금 여기, 첫 땀을 바느질할 자리를 찾고서, "단순하고 정직한 한 땀"을 바느질하라고 한다. "꼭 예쁘지 않아도 된다"고, "강하고 진실한 한 땀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무얼 하냐고?
"그렇게 한 땀을 바느질한 당신은 다음의 한 땀을 바느질한다. p186"
다시 쓸 만한 상태를 되찾는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정말로.
그리고 당신은 사실상 새 바늘땀을 견딜 수 있는 구멍의 가장자리부터 짜깁기를 시작한다.
(...) 헤진 곳을 깁고, 조각 난 것을 엮어가면서 난 그렇게 삶을 이어왔다. 내 인생은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 엮여 있는 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그게 바로 나다.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