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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Apr 24. 2016

14. 소설가 윤이형의 쿤

마음이 어려지고 약해질 때

2014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 수록작: 윤이형, "쿤"

  만화 "진격의 거인"을 보고 난 뒤 때때로 상상하곤 했다. 거인의 목덜미 속에서 발견된 에렌처럼, 내 몸뚱이 어딘가에 산 채로 파묻혀 있는 누군가를. 그녀는 목덜미보다는 좌심실 구석탱이나 측두엽 깊숙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나란 인간의 정수로만 구성된 '진짜 나'일까. 아니면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어리고 유약한 나'일까.



  어느 봄밤이었다. 뇌우로 발코니 창이 번쩍이며 거세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아이는 흥분과 무섬증이 반씩 섞인 비명을 내지르곤 했다. 제주에는 초속 27미터의 강풍이 신호등을 꺾고 가로수를 쓰러트렸으며, 공사 현장의 건축자재와 도시 곳곳의 간판 들을 날려버렸다. 항공기 200여편이 결항되고 관광객 일만여명의 발이 묶였다. 그리고 이집 아저씨는, 감감무소식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낫질하는 날이면 전화기만 울려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데, 이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고 '모른다'고 결론내린다. 번개가 후려칠 때마다 아이는 아빠가 걱정된다면서 발을 동동 굴리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를 달랜다.

  "저건 그냥 봄비, 아빠는 어른!"

  하지만 마음은 집안 가재도구가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같이 동요한다. (아니, 바람 좀 분다고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가 흔들리는 건 뭔가. 어쩌면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건 이집 아저씨가 아닌 이 아파트의 안전도인가...)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다가 이상기류를 만나 터뷸런스가 발생하는 일이 있다. 마치 자갈길 위를 달리듯이 기체가 흔들리는 바람에 구토야 유발되겠지만 그리 위험한 건 아니라고 한다. 속도를 낮춰 기류를 타면서 곧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낮은 고도에서 발생하기 쉽다. 가령, 비행기가 이착륙을 하는 순간 풍속과 풍향이 급작스럽게 변하는 윈드시어를 만난다면 그때야말로 아주 위험하다는 것.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자존감이 형편없이 낮아져 있는데 삶의 이상기류를 맞닥뜨리면 마음이 심한 터뷸런스를 일으킨다. 결국 정신연령이 급격하게 추락한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의존하는 자신을, 세상을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연령은 더 낮아진다. 인간은 이렇게 추락하는 거구나, 깨달음을 얻지만 그 깨달음이 추락의 속도와 방향을 바꾸는 건 아니다.




  그럴 때면 진짜 나는 다치지 않게 어딘가 고이 모셔두고 고난의 시간을 대신 통과해줄 이가 있으면 좋겠다. 나 대신 상처 받고, 나 대신 고통을 견뎌내며, 나 대신 해야할 바를 묵묵히 수행하며 늙어가는... 또 다른 나. 껍데기에 불과할지라도 진격의 거인처럼 힘이 센 나. 그래서 마음 약한 나 대신 누군가를 무자비하게 공격할 수도 있는 나.


  윤이형 작가의 단편 <쿤의 여행> 속 주인공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다. 바로 '쿤'이다. "처음에는 우무나 곤약과 비슷하게 물컹거리는 회백색 덩어리였던 그것은 다 자라자 무표정한 마흔 살 여자의 모습으로 굳었"고, 주인공은 쿤의 등에 달라붙어 산다. 쿤이 그녀의 삶을 감당하는 동안 쿤은 그녀가 자랄 모습으로 자라나고, 그녀는 작고 여린 소녀로 남는다.  


"쿤을 뜯어냈다. 말 그대로, 뜯어냈다. 길고 힘든 수술이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단했듯이 종내는 쿤을 뜯어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른이 되는 시간"이 찾아 오는 거다. 홀로 서기 힘들어 넘어지기 일쑤고, 그런 나를 미더워하지 않는 시선에 자꾸만 위축된다. 다시 누군가의 단단한 등 뒤로 숨고만 싶어진다. 그럴 때 자책하지 않도록, 적어도 외로워지지 않도록, 소설 속에서처럼 다정하게 말해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 고생은 하지 말라고, 고생하는 것과 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또는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고... 비록 고생은 피할 수 없고, 자라지 않는 건 전혀 괜찮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쿤을 없애는 방법은?

  먼저,   


            "거울을 볼 것.(p101)"  

 

  은연중에 삶의 주도권을 양도해간 나의 '쿤'을 알아차릴 것.

  쿤에게 삶을 의탁한 탓에 성장하지 못한 내 모습을 목도할 것.

  오래 깊이 들여다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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