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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09. 2019

초콜릿 말고 대추

2018. 10. 24.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모터사이클은 전적으로 이성의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또한 모터사이클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공부는 실제로 합리적 이성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공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p175


아이가 운동 끝내는 시각에 맞춰 단골 식품점에 들렀다. 500g짜리 사과대추 두 팩이 남아 있었다. 얼마 전 내가 두 팩을 집고간 뒤 그대로였다.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찬 큼지막한 대추들은 며칠 전만 해도 윤기 흐르고 탱탱했는데 몇몇이 그새 주름 잡혀 있었다. 초록이 뒤섞여 얼룩덜룩한 대추는 이제 한두알에 불과하고 거개가 다홍빛으로 진해졌다. 잠시 망설이다 두 상자 모두 장바구니에 담았다. 제가 싹쓸이하네요, 사장님에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이상하게 대추가 맛있다고, 생전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아주 미친 듯이 먹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자기도 요즘 대추를 자주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추가 신경안정제 역할을 한다네요.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여, 몸이 원한 거였어?

내가 대추를 깨물고 우물우물할 때마다 아이가 아주 웃겨 죽겠다는 얼굴을 한다.

엄마, 다람쥐 같아.
응응.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과일보다는 나무열매를 먹는 기분이다.

천연 신경안정제, 대추  :)


  대추가 '천연 신경안정제', '천연수면제'로 불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대추에는 '갈락토오스, 수크로오스, 맥아당' 등의 당 성분이 많다고 한다. 당분을 섭취하면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분비되는데, 이는 우리의 행복에 관여하는 중요한 화학물질이다. 대표적인 우울증약인 프로작은 바로 이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인다. 그러니까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누군가는 초콜릿과 케이크를 흡입하고, 누군가는 대추를 미친듯이 씹어댄다. 이게 다 뇌가 시키는 일이라니까.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당을 공급하는 것이다. 뭐, 임시땜빵격이긴 하지만.   
  대추의 효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식품영양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추에 함유된 '사포닌, 폴리사카라이드, 플라보노이드 성분'은 신경을 이완시켜 불면증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게다가, 식욕 촉진, 소화기능 회복, 자양강장 효과, 심장혈관 기능 강화, 노화 방지, 그리고 항암효과까지 있다는데...

  이 정도면 거의 만병통치약인데;;;

  어쨌거나, 과다섭취에 따른 후유증만 따져봐도 초콜릿보다는 대추가 나을 것 같긴 하다.   


사실 내 신경안정제는 따로 있다. :)

철학자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부제는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저자가 열한살짜리 아들, 그리고 두 친구와 함께 떠난 모터사이클 여행기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으나,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통한 저자의 철학적 사유를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철학서라 할 수 있다. 강의실과 책상이 아니라, 삶과 길에서의 사유라는 측면에서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떠올리게도 한다.


 "다른 사람의 지혜는 우리 자신의 피로 덧쓰지 않는 한 무미건조한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이다.
세상에 먹히고 할퀴어야 비로소 세상을 의식할 수 있다."
- 에릭 호퍼


피어시그는 9세에 아이큐 170을 기록하고 15세에 미네소타 대학 화학과 신입생 과정을 수료한 수재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군복무를 계기로 그는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학으로 돌아와 철학으로 학사를 받는다. 인도에서 잠시 동양철학을 공부하다가 귀국해서 이번에는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영작문 담당교수,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지만 심각한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만다. 이 모터사이클 여행은 우울증에서 회복된 뒤에 아들과 떠난 것이었다.


피어시그의 작가이력을 살펴보면, '세상에 먹히고 할퀴어야 비로소 세상을 의식할 수 있다'는 호퍼의 말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보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울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특히 책의 마지막이 그러했다. 그가 아들과 나눈 대화를 읽다가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들고 몇년치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야금야금 해치우고 있다.
대추와 함께.




“서두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유해하기 이를 데 없는 20세기적 태도다. 만일 당신이 무슨 일을 서둘러 처리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일에 더 이상 애정을 쏟을 만큼 관심을 갖지 않고 어서 다른 일로 옮겨가기 바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의 세계를 선명하게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이는 낯섦이 아니라 일상성이다. 낯익음도 보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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