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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11. 2019

세월과 잘 흥정하기

2019. 3. 9. 흙의 날. 미세먼지, 드디어 보통.


이른 아침 남편과 종로 거리를 걸었다. 어쩐지 신이 났다. 오랜만이다, 그치. 믿을 수 없다, 아침 아홉시의 종로라니. 남편이 뭔가 웃긴 소리를 해서 킥킥거렸다. 이렇게 가볍게 웃음을 주고받은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말을 재치있게 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말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과 어투가 있다. 그럴 때의 그는 소년처럼 보인다. 나는 그런 그를, 그 소년스러움을 사랑한다. 그도 나도 세월에 아주 큰 값을 치루며 지내는데, 무엇을 내줬는지는 알겠으나, 무엇이 되돌아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 순간 우리는 원래의 우리로 돌아와서 웃고 있었다. 아무도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해방감으로 들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일에 잠시라도 벗어나 있다는 착각이 우리에겐 필요했고,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마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홀가분했다.


낙원상가를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풀메이크업을 하고 스키니진에 가죽재킷을 입은 젊은 여자들이 좁은 길목을 가로막듯이 서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려는데, 한 여자가 쓰러질 듯이 비틀거려 움찔 놀랐다. 짧은 티셔츠 아래로 배꼽을 드러낸 또 다른 여자가 그녀를 붙잡고 뭐라뭐라 떠들어댔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여자 모두 만취해 있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게 몹시 놀라웠다. 입만 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들의 상태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도 이렇게 취해서는 종로의 새벽을 걸은 적이 있었다. 남편과 눈웃음을 주고 받았다. 예전에는 종종 봤던 모습인데,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벌써 이십년쯤 전이었다. 이십년이라니... 실감나지 않는 길이의 시간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리는 익선동 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들이 떠밀려가듯 골목을 채우던 얼마 전과 사뭇 달랐다. 한 여자가 짐가방을 끌고 한옥집에 들어서는 걸 봤다. 게스트하우스였다. 가게들은 대부분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실내가 아예 어둑한 곳도 꽤 있었다. 유리창으로 젊은 직원들이 반죽을 치대거나 걸레질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문을 연 곳은 플라워카페 마당이 유일했는데, 작정하고 찾아온 듯한 관광객들이 테이블 몇 개를 벌써 차지하고 있었다. 지나번 이곳을 지나쳤을 때는 사람들이 건물의 두 면을 감싸듯이 줄을 서고 있어서 아예 들어가볼 염두도 내지 못했다. 카페는 아침에 어울리는 상쾌함과 꽃집 특유의 달콤한 향으로 가득했다. 프리지아를 오래 쳐다봤는데도 남편이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가만히 있길래, 비싸네, 하고 말았다. 사준다고 나섰다면 괜찮다고 거절했을 텐데. 그러니까 기쁨을 공짜로 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런 기회들이 살다 보면 꽤 많은데, 남편은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 꽃도 커피도 비싸서 냄새만 맡고 나왔다. 커피는 아침 식사를 하고 마시자 했다. 도끼 빗의 빗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 골목들을 따라걸었다. 길이 한가해서 걷기 좋았기에 비어 있고 잠겨 있는 가게들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밥짓는 냄새와 생활의 소리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지나간 시간만큼 더 지나게 되면 이곳에 뭐가 있게 될지 짐작하는 건 쉽지 않았다. 골목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지. 피맛골처럼. 남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맛골은 아직 남아 있다. 있는 데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 옛 정취만 사라진 게 아니다. 고불고불한 길이 지닌 고유한 정체성과 좁은 공간에 들끓던 활기를 내주고 길의 역할과 이름만 간신히 지켰다. 피맛골은 세월과의 흥정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실패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순순히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남편의 팔짱을 낀다. 그는 그런 나를 흘깃 보고 내 어깨 너머 유리창에 비친 자신으로 시선을 옮긴다. 둘 다 얼굴이 너무 부었어, 하고 웃는다. 부은 눈으로 소년처럼 웃길래 가슴이 뭉클하고 말았다.


  

세월과 영리하게 흥정해야겠다. 역할로만 남지 말자. 밑천을 더 두둑이 쌓아야지. 포기해도 괜찮을 것, 끝까지 지켜낼 것, 뭐 그런 것들을 난생 처음으로 따져보던 아침.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 마스다 미리.
산책하듯 가볍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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