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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13. 201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2018. 9. 18. 불의 날. 

<The Normal Chaos of Love> by Ulrich Beck, Elisabeth Beck-Gernsheim



울리히 벡, 엘리자베쓰 벡-게른샤임이 공저한 이 책은 2010년 9월 5일, 아름다운 가게에서 단돈 3,500원에 구입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날벼락이 친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책을 구입하면 이런 흥미로운 기록을 남겨둬야겠다. 속지에는 "심봤다!"라는 외침도 날림체로 적혀 있었는데, 정작 책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일단 서문과 4장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를 읽었다. 이번에는 좌절과 회한, 반성과 성찰의 밑줄을 곳곳에 그어가며 읽은 티도 팍팍 냈다.

남편과 썸 아닌 썸을 타던 5년간, 혹은 결혼 직후였다면 1,2장부터 차근차근 읽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는 한정돼 있고, 선택과 집중은 독서에도 필요하므로 이성간의 사랑은 건너뛰었다. (남편아, 미안하다;;)



이런 선택은 얼마 전에 있었던 해프닝 때문이다. 내가 아이 앞에서 감정발작을 일으켰던 것이다.

내 감정을 들끓게 한 건 아이가 내게 건넨 말 한마디였다. 

"웬 오지랖." 

뒷목을 부여잡을 뻔했다. 말본새가 그게 뭐냐고 한바탕했다.

아이를 내보낸 뒤 열이 식지 않아, 결혼 전부터 알고 지냈던 k언니에게 전화했다. 우리의 두 딸은 이제 우리보다 더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베프가 돼 있는 터였고, 언니는 누구보다 우리 모녀를 잘 알았다. 내가 거의 일러바치는 듯한 어조로 떠들어대자, 언니가 예의, 내가 애정해마지 않는 뱃속 깊은 데서 시작되는 듯한 그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넌 심각한데, 난 왜 일케 웃기냐. 걔가 진짜 그랬어? 많이 컸네!"
그리고 갈갈갈.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한바탕 웃고 나니, 나도 덩달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딸, 많이 컸네.

하지만 한번 기분 좋게 웃었다고 감정이 완전히 풀릴리 없었다. 나는 옹졸하고 뒤끝이 길다. 이번에는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아이의 행태를 성토했다. 남편은 옷을 갈아입으며 침착하게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런 사소한 걸로 애를 잡냐?" 

그 말에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감정이 마구 부풀어올라서는,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마치 변심한 연인을 향한 배신감으로 부들거리는 녀자처럼 떠들어댔다. 남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내 하소연을 조용히 경청한 뒤 짧고 굵은 한방을 다시 날렸다. 

"설마 그런 말들까지 애한테 한 건 아니지?"  

“아니지, 그건 쪽팔려서 못했지...”

그래서 읽기 시작했던 거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결론을 말하자면, 완전히 차분해졌고 내 감정발작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책을 읽는 내내 뭐랄까, 엄마로서의 내 심리와 행동이 냉정하게 분석되는 것 같았다. 특히 '사랑이 지나칠 때' 벌어지는 일들을 보자니 그러했다.


"적절한 잡지와 책들로 무장한 채, 부모들은 정서적인 분출로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유아원을 교훈적인 온실로 변화시킨다.
...아이는 언제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따르기보다는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끌려간다.
...인간이라는 작은물질 덩어리를 '모범적 어린아이'의 시리즈물에 나오는 완벽한 본보기로 갈고 닦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중에서


요즘의 나는 정말 오지랖을 떨고 있는지도 몰라. 만약 60대의 내 엄마가 내 일에 지나치게 참견한다면, 나 또한 속으로 똑같이 대꾸했을지도.

책을 읽은 그날 밤, 아이에게 내가 지나쳤다고 사과했다. 아이는 자신이 말을 함부로 했고 자기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뜨겁게 와락. (내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도 아이가 카톡 메시지가 계속 들어오는 폰에서 시선을 못 떼는 건 물론 모른 척했다::: 우리의 사랑이 균형이 맞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내가 엄마에게 조금 주고 많이 남은 사랑을 내 아이에게 주고, 내 아이도 혹 엄마가 된다면 내게 주고 남은 사랑을 아낌없이 쓰겠지.)

뭐, 이런, 나름 훈훈한 엔딩으로 끝났다는, 주말의 독서. 


오늘 처음으로, 

아이에게 오지랖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나저나 이사할 때나 되어서야 바깥공기를 쐬는 쟤네들, 불쌍해서 어쩌냐, 책장을 보며 생각한다.

가끔 이런 식으로 먼지털이 독서를 해도 좋겠다.

덧.
이 책은 90년대에 쓰였는데도 대한민국의 현재를 설명해주는 듯했다. 산업사회의 개인화에 대한 대목들은 특히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몇년 뒤가 될지 모르겠으나, 6장 <사랑, 우리의 세속적 종교> 편은 꼭 읽어보자고 다짐해본다. 그저 이런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혼란스러워하며 읽지 않길 바랄 뿐. 혹시 또 알겠는가. 본격적인 중2의 시절이 도래했으니 또 부들부들거리며 책을 꺼내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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