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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12. 2019

세상의 모든 책들, 중쇄를 찍자

마츠다 나오코, <중판출래>



얼마 전 우리 동네 유일한 만화 대여점이 문을 닫았다. 십년 전 이곳에 이사온 뒤부터 일년에 한두번씩 들락거렸던 곳이었다. 진격의 거인, 기생수, 신의 물방울, 니시 케이코와 강풀의 만화 들을 여기서 빌려 읽었고, 지난겨울 아이가 생전 처음으로 만화를 대여한 곳도 여기였다. (아이가 읽은 건 하백의 신부. 뭐, 이런 걸 읽냐 이러다 손가락 발가락 다 문드러지겠다, 놀려대며 나도 같이 읽었다.)


한 자리에서 십여년을 버텨낸 점포가 폐점 준비 중인 걸 보니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단골도 아니었고 주인과 살갑게 인사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내가 밀려나는 듯 씁쓸했달까. 이제 상가의 시작을 함께 한 곳은 베스킨 라빈스와 던킨 도너츠, 그리고 두 군데의 약국이 전부인 것 같다. 그 외에는 위치가 바뀌거나 업종이 변경되거나 아예 이 지역에서 밀려나다시피 떠났다. 물론 확장이전한 점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에는 어떤 가게든 오픈하고 2,3년 버텨내기 어렵다는 말이 실감난다.


얼마 전에 <중판출래>라는 일드를 봤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중쇄를 찍자'. 별 기대 없이 봤다가 여주가 뿜어대는 '간바떼 구다사이!' 아우라에 홀려 순식간에 시즌을 끝냈다. (사실 오다기리 조가 나온다길래 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막 야근해야할 것 같고,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뛰어올라가야 할 것 같다. 수세기 전 무덤파고 드러누운 노동욕구를 기적적으로 회생시키는 이상異常세계가 매회 펼쳐진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원작 만화를 발견, 몹시 흥분하며 빌려왔다.

작년이었나. 피드에서 몇 번 리뷰를 봤던 만화책이었으나 그때는 딱히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만화 마니아나 출판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아주 흥미롭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넘겼던 만화였다.
그러니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원작을 보게 된 드문 케이스.

남편은 일드 1·2편을 내리 보면서 동네 만화대여점이 폐점한 걸 몹시 아쉬워했고, 내가 도서관에서 만화를 구해오자 기뻐했다. (책을 잘 빌려왔다고 칭찬받은 게 얼마만인가!) 남편은 만화보다 드라마가 낫다고 했다. (드라마도 만화도 보다 말았으면서 뭘.)


드라마와 만화를 모두 끝낸 이 몸은 단언컨대 만족했다.


드라마의 활기와 원작만화의 디테일이 서로 관여하니 감상이 더 풍성해진다.

가령, 출판사 사장의 인생담이 펼쳐지는 드라마 5화는 아무래도 이미지화된 스토리에 집중하게 한다. 그 이미지가 즉각적이고도 강렬하게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원작은, 이 또한 이미지가 중요한 만화책이긴 하나, 이미지보다는 언어, 문장 자체에 더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하나둘씩 쌓인 문장들이 에피소드의 결정적 대사라는 비등점을 향해 뭉근하게 감정을 끓어 올린다.


드라마에서는 흡사 만화 캐릭터 같은 인물들이 보는 즐거움을 더하고, 원작에서 더 깊이 있는 사연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드라마로 옮겨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제법 있어서 흡사 스핀오프나 보너스 영상을 보는 것 다. 더불어 작가 후기도 그 어떤 쿠키영상 못지않게 재미다.


(‘하백의 신부’의 경우에는, 만화보다 후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후기가 더 재미나다는 말에 아이는 짜증을 내며 만화책을 뺏곤 했다. 만화 주인공들에 감정이입하는 딸 놀리는 재미는 더 쏠쏠.)


딸이 처음 대여한 만화책. 동네 대여점이 문을 닫은 뒤 아이는 웹툰의 세계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여주를 맡았던 쿠로키 하루의 상큼한 매력을 만화가 넘어서긴 어려울 듯. 오다기리 상은 싱크로율이 제법 좋았으나. 무엇보다 우수 어린 다크서클과 살짝 초점이 어긋난 눈빛, 이 이상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미소, 말라죽은 내 낭만도 심폐소생시키는 그 오묘한 매력을 아끼지 않아줘서 감사했다.
(심야식당에서는 정말이지 한숨만... )


누구세요....


이야기가 길었다.

결론은,
역시 만화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는 거다.
그 세계가 농구 코트이든 와인 바든 편집사무실이든 어디든 간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책들, "중쇄를 찍자!"
그리고 000 왕자와 0 공주 사장님,
어디서 뭘 하시든 간바떼 구다사이!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 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중쇄를 찍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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