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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09. 2019

정직하고 성실한 슬픔

손홍규,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작가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머리맡에 두고 읽고 있다. 읽다 보니 가을(밤) 내내 이 산문집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가 여러번 멈추고 문장이 환기시킨 정서에 빠져 있곤 했다. 에세이를 읽을 때는, 아무래도 글쓴이가 전하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 이야기에 묻어나오는 글쓴이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 고유의 정서가 더 세밀하게 만져진달까. 손홍규 작가의 최근 단편들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그 작품들에서 느껴지던 어떤 분위기가 이 산문집에서 더 진하게 풍겨나오는 듯했다. 순박하고 곧은 마음, 혹은 손끝에 박인 굳은살처럼 정직하고 성실한 슬픔, 같은 것. 동세대 작가라서 공감되는 장면들도 퍽 많았다. 비슷한 시절들을 겪으며 같이 나이드는 작가가 있어서, 그가 시절마다 꾸준하게 글을 써줘서, 내가 놓치거나 놓아버린 장면들을 고집스레 짚어줘서, 


다행이다.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나를 위해 한 권을, 그리고 h를 위해 또 한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이가 깊어도 모든 감정을 공유할 수는 없다. 우정이 전부였던 어린 시절에는 그게 못내 서운했다. 나는 어리석어서 아주 오래 앓고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정서는 어떤 사이에서만 온전히 나눌 수 있고, ‘온전히’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해야 함을.


내 마음 알겠지? 당연하지, 이런 대화조차 필요 없는 사이, 필요없는 감정, 관계와 정서의 개별성을 가능케 한 시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몇 개월만에 다짜고짜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책을 읽다 보니 니 생각이 나서, 니가 좋아할 것 같아, 내 이런 뜬금없는 문자에 보고 싶다고 찰떡같이 대꾸해줘서 쓸쓸함이 가시던 오후.


h는 책을 받았고, 나는 아직 받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처럼 차갑고 고즈넉했던 겨울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상을 치르는 내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차츰차츰 내 가슴 한구석에서 난생처음 겪어보는 어떤 감정이 치솟았고 그 감정은 송곳처럼 날카로워서 한 가닥 전선이 내 몸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처음인 듯 ‘여의다’라는 말을 중얼거렸고 그 낱말이 지닌 뜻이 너무나 분명해 슬픔에 빠졌으며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모호한 단어들을 하나씩 하나씩 명백한 단어들로 뒤바꿔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낱말을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는 최초의 순간이 있다. 그 최초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낱말을 아직 체험하지 않았던 시절이 몹시 그리울 때도 있다.” - 책속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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