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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14. 2022

우리는 또 어떤 생존담을 이야기하게 될까.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밤이 묵직하게 자리잡은 주택가, 나트륨 가로등이 허공으로 뿜어낸 주홍빛은 멀리 뻗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스며들고, 담벼락 틈새, 모퉁이 너머,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 속이 시커먼 승합차와 닫히다 만 건지 열어놓은 건지 알 수 없는 대문, 어둠을 증폭시키고 골목의 명암을 대비시키는, 밤의 이 모든 무신경함을 내가 떠올리고 있었을 때 J가 내게로 시선을 맞췄다.    

"그런 상상해본 적 있는데..."

작년 늦가을 어느 저녁, 우리는 스우파 리더들이 총출동한 아는 형님을 보고 있었고, 때마침 허니제이가 오밤중에 발차기로 치한을 퇴치한 일화를 떠들던 참이었다.         

"나중에 나도 저런 데서 혼자 살지 모르잖아. 밤늦게 골목길을 걷다가 저런 미친**를 만나면,"

수년간 영화적 상상력으로 다져진 허무맹랑한 치한퇴치법이 그렇게 시작됐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흐음... 남편은 낯색을 바꿨다. “그래 뭐 일단은 전기충격기가 가장 현실적이긴 한데, 어쨌든 절대 포기하지 말고, 허니제이처럼 미친듯이 발악해야 해.” 그러곤 어린 시절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처음 맞닥뜨린 거리의 폭력을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신발주머니를 달랑거리며 귀가하던 그를 무서운 형아들이 불러세운 것이다. “야!” 그러나 뺏길 돈이 없어 더 무서웠다는 슬픈 이야기. 결론은 이러했다. “누군가 ‘야!’하고 부르면 무조건 튀어.” 불러 세운다고 멈추고 눈 마주치면 이미 끝난 거라나.




야! 이 한마디에도, 찰나의 눈 마주침에도, 머리보다 몸이 알아서 반응할 때가 있다. 대뇌피질이 시동을 걸기도 전에 원시뇌가 발작해버리는 거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생존본능이 발동했던 경험들을 나 또한 꺼내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야자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마주친 한 남자의 ‘돌아버린 눈빛’에 관한 것이었다. 일종의 (어쩌면 원시뇌의) 무용담처럼 기세등등하게 떠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하지만 내 모든 도망들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력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어떤 폭력은 본능만으로 피할 수 없다. 경계가 모호하여 정의내리지 못한, 당시엔 실체를 몰랐던, 혹은 알면서도 위계에 눌렸거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저 추행이 아닌 기행으로 정의 내려버린, 그 순간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모멸과 수치로 치를 떨지만 상대가 아니라 당당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게 한, 그저 불쾌할 뿐 별것 아니라 치부해버린 폭력들. 그런 폭력들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나와 남편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이미 J는 많은 증언들을 들어 알고 있다. 


사회의 온갖 부조리한 폭력을 성토할 때조차 J는 목소리에 그늘이 없고 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안도하지만 이게 한시적임을 안다. "내게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특성들로 인해 부당하게 소외· 배제되지 않고, 어떤 폭력에도 상처받지 않은, 이다지도 안온한 유리온실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더 넓은 세계로 뛰어들면 곧 깨지지 않을까. 


유리온실을 깨고 나온 아이는, 이 아이들은 마주한 세계를 어떻게 살아나갈까. 어떤 언어를 지니게 될까.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어떤 공통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게 될까. 


너희들은 또 어떤 생존담을 이야기하게 될까.       




한 시절을 함께한 이들과는 일정 정도 공통의 언어와 경험을 구축하게 되는데, 그게 공통의 생존담이 될 때 공감이나 연대감보다 더 뜨겁고 열렬한 결속감이 생겨나는 것 같다. 


이런 생존담을, 누군가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이야기로, 충분히 고통스럽지만 완벽하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누군가는 “나도 그래, 나도 알아, 그걸 알아,” 중얼거리며 밤잠을 설치다가 종내는 당신의 이야기가 “나를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뜨겁게 고백하게 되겠지. 황정은 작가가 초조한 마음을 붙들고 최은미 작가를 찾아 나섰듯이. 



<눈으로 만든 사람>을 읽고 있다.


책의 후반부로 접어들었는데, 첫 수록작을 읽으면서 시작된 두근거림이 도통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격렬하게 들쑤시고 동요시킨다. 건조하게 서술할 때조차 인물의 들끓는 마음이 느껴진다. 읽어낸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생존담 같다. 단절과 고립, 폭력과 상실의 시절들을 버텨냈고, 살아남았는데도, 살아남아 온전해진 게 아니라 너덜너덜해진 여자들. 시절에 대한 고백과 성토를 끝낸 뒤 더 외로워지고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 그런 그들의 곁을 지키는 건 또 다른 생존자이거나 이미 유실된 이들의 그림자다.      


나도 잘 알지, 이 마음을 아주 잘 알지, 중얼거리면서, 남은 이야기들은 또 어떻게 읽어내나 마음이 한없이 무거운 채로 여전히 읽고 있다.      


덧. 

그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면, 나는 딸의 상상에 실소를 터트리고, 남편의 말을 적당히 거들고, 뭐 그러다가 조금 슬퍼졌다. 

J가 벌써 혼자 살 미래를 생각해보고 있구나. 그것도 꽤 구체적으로, 주거환경까지 그려가며...

(주거환경은 그다지도 현실적인데, 네 대처법은 왜 그리 비현실적인 거냐.)

벌써, 라는 말이 마음을 온통 헤집어놓았던 저녁.


#집밖은위험하고

#빈둥지는슬프고     


돌담 불빛을 따라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윤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유치도 다 안 빠진 것들이˝ 하며 조금 웃었다. 비슷한 길이로 자른 두 윤이의 머리카락이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며 멀어졌다. 지금은 유치도 다 안 빠진 저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는 영구적으로 써야만 하는 이를 가지고 살아가겠지. 지금보다 기다란 팔다리로 허우적거리면서 누군가한테 다가가고, 멀어지고, 사랑이 가져오는 것들을 모른 채로 사랑하고, 알고도 사랑하면서, 윤이들이 시기마다 겪어갈 상실감의 무늬들을 생각하자 가슴 제일 깊은 곳이 아려왔다. - "보내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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