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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15. 2022

자신에게 무례해지지 말 것

최다혜, 아무렇지 않다


도무지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목덜미에서 등줄기로, 겨드랑이까지 땀으로 젖어드는 난처함은 나만 아는 것이다. 이마에 배는 땀은 짐짓 날씨 탓을 하며 슬며시 손등으로 닦아낸다. 심장이 아파올 만큼 뛰는 것도 꾹꾹 눌러가며 참을 수 있다. 손끝이 차가워지다가 가늘게 떨려오면 얼른 주머니에 넣어 버린다.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건 막을 도리가 없어. 나는 얼굴이 잘 빨개지는 아이였다. 귓바퀴까지 뜨끈해질 만큼 열기가 온 얼굴을 번져오면 마치 무방비하게 맨몸을 드러낸 듯한 부끄러움에 더 몸둘 바를 몰랐다. 자라면서 감정은 통제해갔고, 대처법도 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다가 마침내 아무렇지 않게 되었던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일면 뻔뻔한 인간이 되었음을 반증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쉽게 허물어지곤 한다. 누군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 감정을 이입해버리는 거다. 그런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고는 못배기겠다.   

   


최다혜, <아무렇지 않다>      
외주작업에 쫓겨 아직 자신의 책을 내지 못한 일러스트레이터 지현은 출판사로부터 작품 의뢰와 함께 저작재산권 양도 계약서를 받고 고민에 빠진다. 학자금을 갚기에도 생활이 빠듯하여 아직 박사과정을 밟지 못한 시간강사 은영은 그녀의 미학수업이 최고의 강의로 기억될 거라는 학생의 메일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다른 통보도 없이 강사계약이 종료되었음을 알게 된다. 가난한 무명작가 지은은 회사를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몰두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재취업을 고민하게 된다. 



이미 제목에서 짐작했지만 정말이지 쉽지 않은 그래픽노블이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에 인물들이 놓일 때마다 마음이 동요했다. 지현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손바닥에 빨개진 얼굴을 묻을 때, 은영이 부모 앞에서 치받는 감정을 못이기곤 얼굴 붉히며 소리칠 때, 지은이 입시학원 계단에서 여고생을 스쳐지나갈 때 붉어진 얼굴은 한참이나 가시질 않는다. “불행은 늘 초대없이 무례하게 찾아”와선 그녀들을 선택의 기로로 몰고 간다. 소중한 걸 내주고 그녀들이 한줌 거머쥔 것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지끈거린다. 


불안정한 고용환경, 경제적 가치로 즉각 환산되지 않는 예술노동, 업계마다 만연한 부당한 관행, 개인의 열정과 노력을 짓밟는 예술계의 심사비리,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적 곤궁이 개인의 무능 혹은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고 함부로 단정짓는 세상의 무례함. 


지현과 은영의 이야기를 거쳐 지은에게로 다다를 때까지 그녀들이 고요하게 표출하던 감정들이 빠짐없이 내 안에 스며들었고, 종내는 세 사람분의 슬픔을 품은 듯한 지은의 눈물이 그때까지 꾹꾹 눌러참던 내 감정의 표면장력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다가도 불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녀들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그녀들에게서 건너온 거라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안에서 감정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던 거다. 그럴 때면 그녀들의 얼굴들을 더듬어봤다. 속수무책으로 붉어진 얼굴들과 고단함과 좌절로 어느덧 무표정해진 얼굴들. 그녀들의 얼굴을 하고서 누군가는 방안이 어둑해질 때까지 망연하게 앉아있거나, 누구에게도 위탁할 수 없는 감정들을 품어안은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거나, 입안 가득 밥을 물고서 시큰해진 코끝을 문지를 것만 같다. 누군가의 말 없는 눈물이 방바닥에, 뒤집어놓은 휴대폰에 떨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 


누군가는 불안 속에서도 한 발짝 더 내딛고, 누군가는 신발을 바꿔 신으며 잠시간의 유예를 갖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되돌아간다. 어쨌든 계속 살아 낸다. 아무렇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무렇지 않은 단단한 삶으로 돌아올 때까지. 


#세상이범하는무례에지지말것 

#자신에게무례해지지말것       


작가의 말 중에서 1
작가의 말 중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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