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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16. 2022

우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우리는 더듬거리고, 사랑하고, 패배한다. 


시청각실을 가득 채운 부모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날 점심께 읽었던 대니 샤피로의 문장을 생각했다.  

바깥은 어둠에 잠겼고 시간은 어느덧 9시를 향해 간다. 어느 곳에서도 뒷모습 하나 허물어진 이가 없다. 대학별 수시 자료화면이 바뀔 때마다 카메라가 찰칵거리고 자료집 페이지가 넘어가며, 나처럼 노안이 온 듯한 엄마들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올봄 학교에서 열린 대학입시 설명회. 


작년의 나는 신청폼이 열린 지 몇 분 만에 광탈했다. 코로나시국이라 방심했다. 올해, 자리를 채운 건 2/3 가량 고1엄마들이었다. 옆동네 학교에서 오래도록 진로지도를 맡아 초빙된 부장 선생님이 면밀한 시선으로 좌중을 훑고는 한때 인기몰이가 대단했던 모 드라마 장면을 스크린에 띄워놓는다. 순간 공간에 서린 긴장이 느슨해진다. 그가 우스개처럼 말한다. “어머님들, 이제 공부하셔야 해요, 하다못해 라면 하나를 끓이는데도 설명서가 붙는데 어떻게 대학을 가는데 전략을 안짭니까.” 1년을 지내보니 실제 그러했다. 꿈의 가시화, 목표의 정량화. 진로를 미리 정할수록 유리한 게임. 우리의 전략은 과연 성공할까. 


수시 성공 사례들을 보여준 뒤 그는 생수로 목을 축이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소서, 봉사, 독서, 수상, 대외활동, 다 빠지고 이제 내신성적이랑 세특만 남잖아요. 세특에 모든 것을 녹여내야 해서 우리 선생님들도 죽어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장 힘들죠. 이것저것 해야될 게 너무 많아요. 애들이 불쌍해요.” 공기 중에 떠돌던 것들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교권 자녀의 부모라고 마음이 가벼울까. 한 지인의 아이는 옆학교에서 2년 내내 1등급 초를 유지했는데 입시 컨설팅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생기부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 한줄서기를 실천하는 이 세계는 이토록 상대적이다. 누구보다 더 해도 누구보다는 덜 한 거다. 생기부의 몇백자로 제한된 공간 속에 교과선생님들은 아이들의 학업역량과 전공적합성을 밝혀야 하고, 아이들은 지필고사와 시험 사이에 촘촘히 치루는 수행평가로 학업능력과 발전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 진로에 맞춤한 동아리활동과 자기주도성 프로젝트, 교내활동 등에 참가해야 하고, 리더쉽을 보이기 위해 임원직과 과목별 부장직을 쟁취해야 한다. 인성까지 포함하여, 이 모든 건 전략적으로. 그렇지만...


삶은 대개 바로 거기 있지만,
지나친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우리를 때려눕히는 것이 삶이다.


아마 ‘전략상’ 우리 중 많은 이가 실패할지도, 아니 어쩌면 대부분이 실패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봐도 ‘전략상’ 성공한 이는 있기 마련이며 이 세계는 이토록 상대적이니까. 나와 아이는 이 세계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아이는 원하는 길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길이 아이가 꿈꾸는 인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마스크를 조금 헐겁게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수첩 귀퉁이에 소심하게 적어본다. 


“나는 더듬거리고, 사랑하고, 패배한다.” 


내가 당도한 곳이 육아의 산맥을 이루는 수많은 산 중 하나이며, 어찌 된 게 매번 정상은 더 높고 길은 더 험한 듯 보이지만, 어찌 됐든 이 산도 넘어설 것임을 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무사히 내려가면 좋겠으나, 곧잘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다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주저앉는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언제나 ‘사랑’이 반짝이고 있어. 그걸 나침판 삼아 방향을 다시 잡는 수밖에. 저만치 발밑에 드리워진 풍경을 내려다본다. 내가 넘어온 산의 풍경들은 언제나 그립고, 돌아볼수록 아름답다. 그렇게 한숨 돌리곤 절뚝이며 산을 오르는 거지. 또 오른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이런 교훈을 오랫동안 배우고 겪어왔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설문지를 빠르게 작성한 뒤 시청각실을 나섰다. 생수와 간식세트를 나눠주던 학운위 엄마에게 설문지를 건넸다. 우리는 마스크 너머로 마주 웃어 보였다. 급격하게 몰려온 피곤이 서늘한 밤공기에 다소 가셨다. 뒤쪽에서 아휴, 어려워 죽겠네, 누가 지레 질린 목소리로 탄식했고, 누군가 웃음을 터뜨리며 몰라몰라, 일단 내일 아침부터 해결해야 해, 마트에 들렀다 가자 했다. 그 말에 나도 우유를 떠올렸다. 그래 일단은 우유를 사자. 나는 주차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2023수능대박기원

#모두에게건투를

           


 We stumble along. We love and we lose. 
 Sometimes we may think that we’re in charge, or that we have things figured out.  Life is usually right there, though, ready to knock us over when we get too sure of ourselves. Fortunately, if we have learned the lessons that years of practice have taught us, when this happens, we endure. We fail better. We sit up, dust ourselves off, and begin again.

-  "Still Writing : The Pleasures and Perils of a Creative Life" by Dani Shap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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