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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17. 2022

만년필의 쓰임새

줄리언 반스,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


먼저 만년필 이야기를 해야겠다. 



남편이 라인프렌즈와 콜라보한 #라미만년필 세트를 J에게 선물했다. 

‘펜 트레이+피규어 문진+만년필 카트리지&컨버터’ 구성인데, 샐리라니 너무 귀엽잖아. 내년에는 꼭 내게도 선물해달라 요구했다. 남편은 할말하않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몇년 전 남편이 사준 만년필 두 개가 떠올랐고, 서랍 속 어딘가에 고이 모셔둔 나머지 존재조차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여 남편의 만년필까지 펜촉 세 개를 세척하곤 컨버터에 잉크를 채워넣었다. 남편이 아주 흡족해했다. 어쩌면 내년 라인라미콜라보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내 방으로 돌아와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잉크가 굳지 않도록 뭐라도 써야 할 텐데... 


J는 만년필로 일기를 쓰고 있다. 아마도 덕질일기인 것 같다. 절대 보지 않았고! 딸잘알 엄마의 직감 같은 거다. 온갖 곳에(심지어 시험지 귀퉁이에도!) 세븐틴의 문준휘를 그것도 한자까지 동원해 끼적여대고 있으며, 보관장소도 거실의 J 전용 책상 서랍인데다가 포카까지 같이 들어 있는 걸 보니 그렇지 않을까 싶은 거다. 그런데 J는 일기장을 왜 대놓고 거실에 놔두는 걸까. (물론 그 또한 J에게 속한 사적 영역이긴 하지만, 더 은밀한 자기 방에도 책상과 서랍장이 있는데 말이다). 부모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거라 믿어서인가, 아니면 그저 귀찮아서인가. 일기가 노골적으로 책상에 놓여 있는 순간에도 내가 단한번 들춰보지 않았던 건 과연 딸의 사생활을 존중해서일까, 아니면 그저 귀찮아서일까. 남편은? 아마 그게 일기장이라는 것도 모를 거다. 


올초 달라지겠다는 결심의 일환으로 양지 다이어리를 몇 년 만에 샀다. 이 두툼한 걸 어딜 가든 가방에 넣고 다닌다. 백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펼쳐들었는데, 몇 개월의 공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늘자를 펼쳤는데, 쓸 말이 없다. 월간계획표로 넘어갔다. 재산세 납부. J 미용실 예약. 건강검진 예약. 끙끙거리다가 이틀 뒤 책 반납 예정까지 써넣었다. 다시 오늘자로 돌아왔다. 


아랫입술을 질근거리다 다이어리를 덮어버렸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진지해지고 싶지 않다고, 내가 비워둔 공간은 그럴 만해서 거기 존재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이어리를 다시 가방 안으로 치워버리고 만년필은 눈에 보이도록 펜 트레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며칠 뒤, 만년필의 쓰임새를 생각해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 


이 책은 현재까지론 내 마음 속 #올해의책 유력 후보이자 #2022베스트 탑 쓰리 중 하나다. 고백하자면 이 근사한 미술에세이를 나는 불온한 의도로 읽기 시작했다. 몇 년간 두세시 전에는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는데, 이 책이 내 긴 밤의 동반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수면제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고백은 작가와도 책과도 무관함을 볼드체로 강조하고 싶다. 나는 반스의 소설을 크게 애정하며, 그의 문체도 좋아하고, 미술을 아주 순수한 의미로 사랑한다(전문지식이 없다는 말)! 그저 책태기라서, 뭐 그런 거지. 대출도서 중에 가장 추상어가 많은 책을 선택했을 뿐. 문제는, 잠이 더 달아난다. 이런 식이다. 자신을 순수 고전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낭만주의 거장 들라크루아와  신고전주의자 앵그르가 색과 선의 우위성을 갖고 다투는데, 너무 재밌다. 이런 흥미진진한 싸움 구경이 불면증에 도움이 될리가. 재밌긴 하지만 내가 이 싸움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색을 잘 다루는 화가라는 칭호는 장점이라기보다는 장애가 된다. (...) 무슨 말이냐면, 색을 잘 다루는 화가는 열등한 것과 이른바 그림의 세속적인 면에만 매달리는 한편 훌륭한 드로잉화의 경우 따분한 색을 보태면 더 훌륭해지니, 결국 색의 주요 기능은 색이 줄 수 있는 위신이 없어도 아무 상관 없는 더 숭고한 속성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데 있다는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일기 중)


도통 무슨 말인지... 수능지문 읽듯 거듭 읽고서야 아, 했다. 그래서 대낮에 바른 정신으로 읽기로 했다. 게다가 작품감상용 노트북이 필참이라.

그렇게 비가 물폭탄처럼 쏟아지던 어느 늦은 오후, '오딜롱 르동' 편을 읽는데... 

불시에 그분이 찾아 오셨다. 


그렇게 (다시) 발견한 만년필의 쓰임새. 


그리고 싶은 건 르동식 꽃수채화이지만 그릴 수 있는 건 나무 드로잉 


그나마 장미꽃 드로잉, 그것도 펜드로잉

  

#일단그릴수있는걸그리자

#만년필의쓰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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