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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18. 2022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

로렌 아이슬리 <광대한 여행>


© Augustine Wong on Unsplsh


0.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초원을 가로지른다. 마침내 사암절벽에 도달한 그는 수천만년은 되었을 시간의 틈새 깊숙이 비집고 들어가 단단한 사암 속에 박힌 두개골을 마주한다. 이 무덤 같은 지질층에 갇혀 언젠가 화석으로 발견될 자신을 상상하다 그는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우리 육체 안에는 머나먼 과거 존재들의 조악함이 남아 있고,
누대에 걸쳐 무수한 생물체가 구름처럼 불규칙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세계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p12



1. 이 책을 펼쳐든 건 한 시가 넘어가던 깊은 밤이었는데, 첫 문장을 읽자마자 확실한 예감이 들었다. 이 책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겠구나. 순전히 첫 문장(혹은 첫 장면)의 힘으로 마지막 문장까지 독자를 견인해가는 책이 있다. 그 밤을 생각하면, 기대치 않게 마주한 매혹적인 장면들과 어둠을 한층 짙게 하는 적요와... 내가 문장을 읽어주자 아이가 손에 턱을 괸 채 잠자코 귀 기울여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거실에서 공부하던 아이에게 달려가 이 장면 너무 근사하지 않냐 호들갑 떠는 나를 보고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뱉던 말까지도. “역시 문과...” 너무 그러지 말자. 대통합의 시대 아니니.)   


"어떤 땅은 평탄하고 풀로 덮여 있으며 구석구석 햇살이 스며들어 마치 인간이나 시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영원히 유년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떤 땅은 속되게 늙은 사람의 얼굴처럼 갈라지고 황폐하며 구불구불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바위들은 뒤틀린 채 솟아올라 있고, 그 표면에 난 검은 구멍들은 햇빛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빛이라고는 한 점도 뿜어내지 않는다." 
                                                                        - 로렌 아이슬리 <광대한 여행>의 첫 


2. 인류학자가 시인의 눈과 마음을 지녔다면 자신의 학문을 어떻게 탐구할까. 로렌 아이슬리처럼 하지 않을까. 어느 날 그는 인류학적 모험에의 충동을 못이기고 로키 산맥에서 발원한 강에 몸을 ‘띄운다’. (그는 수영을 못한다...) 그러곤 지질학적·진화적 역사를 온몸으로 상상하면서 모래톱 가장자리에 이를 때까지 ‘흘러간다.’ (수심이 깊진 않았다...) 수조 밖으로 몸을 던져 죽은 메기에게서는 ‘백만 년의 태곳적 세월이 응축된 도약’을 읽어낸다. 생존을 위한 또 다른 도약, 즉 공기호흡을 실험하던 물고기들의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뭍으로 ‘걸어나간’ 삐죽코 물고기로 이어진다. 이 변변찮은 약자의 몸부림 속에서 인류학적으로 중요한 진화인 대뇌 발생을 짚어낸다. 


3. 문장 때문에 읽기 시작했으나 문장 때문에 종종 길을 헤맸다. 

유려한 문장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땐 이보다 더 완벽한 선택은 없는 듯했다. 그의 문장은 두꺼운 퇴적층 아래 머나먼 세계가 남긴 뼈에 살을 입히고 생명을 불어넣어 아주 생생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문학적 서술이 그 대상을 인상적으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시적 비유의 함의를 곱씹느라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때마다 내 부족한 인문학적 소양을 탓했다. 시적 감수성도 떨어지고 과학서적도 멀리한 지 어언... 융합이 대세인데 말이지. 여하튼 이 책은 ‘문학적인’ 과학에세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효율적인 정보·지식 전달에 최우선하는 건조한 과학서의 정반대편에 있으며, 출간연도가 1950년대인 걸 감안하면, 인류 진화의 세부를 정확하게 따져 살피는 목적에 이 책이 얼마나 적절할지 자신하지 못하겠다. 70년이라면 어떤 획기적인 발견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지 않으려나. 다만 인류의 시초를 감성적이고도 아름답게 서술한 과학에세이를 찾는 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무엇보다 문장이 너무 좋고... 도입부가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며... (여하간 너무 좋다는 말) 


4. “백만년의 시간은 지질학적·진화적으로는 천문학적 시계의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류학자는 삶을, 일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루 혹은 일년이라는 ‘찰나’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낼지 궁금하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돌아볼지도. 찾아보니 두 권이 더 출간돼 있다. “시간의 창공”은 강연모음집이고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은 자서전이다. 자서전부터 읽어보고 싶은데, 절판...  


5. “인간은 잠재적 화석이다”라는 문장을 징검돌 삼아 황정은 작가의 <일기> 에서 이 책으로 건너왔다. 이렇게 문장에서 문장으로,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길이 참 좋다.                 


“40억년 만에 처음으로 한 생명체가 자신에 대해 사색하고, 깊은 밤 갈대에서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 차가운 물가 풀밭에서 아마 그는 자신이 존재 이전에 거대한 여정이 있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아마 이와 똑같은 예감으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 어떤 이들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실내에서 걸어나와 우주의 심연을 응시하다가, 저 공허한 먼길을 거쳐와서 반짝이고 있는 별 하나를 보고는 어떤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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