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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26. 2022

타인을 읽기, 그리고 나를 쓰기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도서관 반납코너에 놓인 책을 호기심에 뒤적이다 문장 하나를 오독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세상 다른 사람 모두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그러면 ‘나머지’ 하나가 네 자신일 거라는 문장이었다. 내가 잘못 읽은 건 단어 하나였다. ‘나머지’를 ‘그 중’으로 읽은 것이다. 단어 하나가 메세지를 완전히 바꿔버린 셈이었다.

뭐, 노안과 주의력 저하 탓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마음에 남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몇 편밖에 읽지 못했으나 책은 전반적으로 다양한 상황에 놓인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읽은 단편들에서 인물과 상황에 심하게 몰입했다. 그녀들은 내 해묵은 욕망과 위선과 민낯을 들춰냈고, 언젠가 내가 느꼈던 모멸, 분노, 슬픔, 혼란의 정체를 보여주었으며, 내가 오래 마음 쓴 일과 못내 마음 쓰인 일, 숨기고 싶던 마음과 잃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되짚어보게 했다.


그녀는, 혹은 아주 작은 일부로서 그녀를 구성하는 나는 오래 전 빠르게 스쳐 지나간 풍경 속, 어쩌면 깨진 가로등 밑에서 서성이거나, 할머니가 덮어준 어둡고 무거운 솜이불 속에서,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무너지는 관계들을 생각하며 여전히 거기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세상 다른 사람 모두를 바라보며 '그 중' 나를 보고, 돌아보고,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오독한 문장을 다시 읽었다.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먼저 세상의 다른 사람 모두가 누구인지 알아라. 그러면 나머지 하나가 네 자신일 테니까.”


어쩐지 더운 공기가 찐득하게 고여 있던 실내에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비집고 들어온 기분이다. 과연 이 문장은 내가 잘못 읽은 문장과 그렇게 다른 것일까. 이 문장이 향하는 곳을 찾아 마저 읽어본다.


 “여성을 보다 더 자기중심적이게 교육한다면, 여성의 삶을 붕괴시키는 수많은 갈등과 단절은 주요한 자아 개념과 관련이 없고, 지엽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메리 캐서린 배트슨, 삶을 구성하기)”


“자신의 경험 안에 자기 자신을 착륙하게” 하는 것. 나에 대한 타인의 인식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바로 지금 내 삶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할 것, 그렇게 완전한 '자기중심성'을 경험하는 것.


이 행위는 전하영 작가의 수상작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속 문장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 우리가 겪은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거야.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타인의 시선 속에서 더는 대상화되지 않고, 주체화라는 착각 속에 타인을 다시 대상화하는 실수도 행하지 않으며, 나의 경험을 재해석해야 하지만 동일하게 타인의 경험을 해석하지 말 것. 무엇보다 ‘현재’에 머물 것,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 것, 그렇게 미래로 향하자고...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무심코 깨달았다. 이 두 문장이 겹쳐지는 지점을. 

소설을 읽고 일기를 쓰는 이유가 이 두 문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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