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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09. 2022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나의 복숭아: 꺼내놓는 비밀들


“기왕 이렇게 된 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강박적으로 기록하던 역사가 꽤 길었고 애당초 타고나길 그런 인간이라 수긍해온 시간도 그만큼 길었기에 나는 내가 평생 그럴 줄 알았다. 절대, 결코, 평생, 영원, 이런 말들은 얼마나 공허한가. 물론 알면서도 바로 몇 시간 전에 “(니 엄마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 하고 강하게 부정했다. (어떤 사람인 걸 부정했는지는 딸과 나 사이의 비밀이라 밝힐 수 없지만 훗날 이 또한 잊은 채 어리둥절해질 내게 기억의 단초로서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였음을 적어두기로 하자.)


요즘에는 가벼운 읽을거리가 좋다. 아무 때나 시작하고 아무데서 멈춰도 좋을 책. 기왕이면 다양한 목소리가 들어 있는 책. 가령 <나의 복숭아>처럼. 어떤 사연도 상관없으니 기왕이면 내 서사에서 3억년 정도 멀면 좋겠다. 그러니까 3억년 전에 인류에게 ‘대뇌’라는 축복의 길을 터놓고서 장렬하게 사라진 삐죽코 물고기의 사연처럼 말이다.


이 희한한 물고기는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에서 만났다. 그는 데본기의 말라가던 습지에서 산소부족으로 허덕이다 어느 날 뭍으로 뛰쳐나온다. 지느러미(!)로 뒤뚱거리며 살 곳을 찾아 헤매는 그의 두뇌 끝에 원활한 양분 공급을 위한 작은 기포 두 개가 생겼고, 어쩌다 대뇌반구가 출현했다는 이야기.


대뇌의 원형이 3억년 전의 물고기가 살아남고자 처절하게 몸부림친 결과임을, 진화를 이뤄낸 게 바다의 승자인 빠르고 강한 경골어류가 아니라 ‘염수와 담수의 분리막’을 통과하여 연못으로, 썩은 웅덩이로, 결국 뭍으로 밀려나온 패자라는 점을,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한 최초의 척추동물”을 평생...이 아니라 아주 오래 못 잊을 듯했고, 그날 나는 모처럼 일기를 썼다.


연필을 손에 쥔 이후로 끼적이던 일기조차 근 2년간 쓰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반성과 성찰은 말할 것도 없고 감정의 토로조차 싫었다. 명사와 동사로 가득찬 건조한 기록으로도 남겨두기 싫었다. 밖에서 들여다보면 썩은 악취가 진동할지 모를 그 따뜻한 진흙 구덩이가 왜 그리 아늑했는지 몸을 묻은 채 숨만 쉬고 있었다. 어쩌면 숨이 모자라 헐떡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적극적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겠으나,




부끄러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의 복숭아>를 읽던 중에 '나의 복숭아'는 무언지 생각해보았고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의 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홉 명의 재기 넘치는 저자들이 솔직하게 혹은 유쾌하게 꺼내놓은 것과 달리 내 비밀은 여전히 그 아늑한 구덩이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 나는 솔직하지도 유쾌하지도 못한 어정쩡한 마음으로 그걸 들여다본다.


후회는 하지만 반성과 성찰은 하지 않기로, 건조한 기록조차 남겨둔 게 없으니 훗날 이 또한 잊은 채 어리둥절해질 내게 기억의 단초로서 지난 시간을 이렇게 매듭지었음을 적어두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왜 복숭아죠? 그저 떠오르는 건 <그해 여름 손님 Call Me By Your Name> 티모시 샬라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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