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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7. 2022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 독특하거나

켄 리우, <종이 동물원>


한 작가의 사적 자산(인종/민족/문화적 배경, 모국어, 정치/역사의식, 혹은 의식 깊이 축적된 민담과 설화 등)이 소설적 질료로 그것도 SF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얼마나 탁월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편집.


필멸과 영생, 생존과 정의, 과학기술의 빛과 그림자, 영혼을 담보로 한 모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다양한 형태의 갈림길에서 인물들은 갈등한다.


이 책을 읽다가 여러 번 울컥했는데, 아무래도 역사적이고도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지점들이 많아서일 거다. SF소설을 읽다가 4.3항쟁을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의 역사의식과 그것을 강단 있게 구현한, 그의 SF적 상상력 앞에 넙죽 엎드렸다.




<종이호랑이>

열린 공간에서 읽다가 대책 없이 눈물이... 아니, 다들 울었다길래, 그걸 의식하느라 되레 건조해질 것 같았는데도... 울었다는 말이지. 


"오랫동안 잊으려고 애썼던 언어가 다시 내게 돌아왔고, 그 말들이 내 안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내 살갗을 뚫고, 내 뼈를 뚫고, 결국에는 내 심장을 꽉 움켜쥘 때까지." p29


<파(波)>

이 단편을 올해의 SF소설로 꼽고 싶...지만 이 책이 올해 처음 읽은 SF소설이라는 게 함정.

오랜 세월 구전되어온 창조신화가 과학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두른 채 또 하나의 창조신화로 거듭난다. 근사하다! 


"사람은 변한단다. 종으로서도 변하고, 개인으로서도 변해." p355


<즐거운 사냥을 하길>

산업화시대 멸종위기에 처한 요괴들의 문제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짚어내고 과학적으로 해결한다.

넷플릭스의 SF 성인 애니메이션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에서 먼저 접했는데, 애니도 무척 흥미로웠고 시각적으로 잘 구현되었으나 원작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

어떤 비밀은 드러냄으로써 제 의미를 찾는다.


젊은 시절 일본의 ‘태평양 횡단 터널’ 건설의 중간관리자로 일했던 찰리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다. 죄책감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찰리. 그는 우연히 웨이트리스 베티와 사랑에 빠지고,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데...


읽다 보니 2차대전 중에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는 한국인 위안부까지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어서, 어느 단편보다도 그 작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인종차별문제까지 건드리는 게 흥미로웠다. 마지막 수록작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 동일한 문제의식/주제를 더 깊이 있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듯.


"비밀을 지키기가 조금이나마 힘들어지게 하는 것. 그건 의미 있는 일이야." p429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말하고자 하는 충동,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그 충동을, 저는 점점 늙어가며 하나둘 세상을 등지는 731부대의 전 대원들과, 희생자들의 자손과, 이야기되지 못한 역사 속의 모든 비극과 함께 느낍니다. 과거에 떠난 희생자들의 침묵은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할 의무를 현재에 부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무를 기꺼이 떠맡을 때 비로소 더없이 자유로워집니다." p558


<송사와 원숭이 왕>

범인은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뛰어난 지략으로 힘없는 백성들의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송사 전호리에게는 저만 아는 은밀한 벗이 있는데, 바로 제천대성 손오공. 어떤 위기도 미꾸라지처럼 벗어나는 전호리에게 어느 날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오고, 그는 대의와 안위 라는 선택지를 두고 갈등하던 끝에 손오공에게 하소연하는데...


청나라 초, 열흘간 80만 양주 주민이 학살된 일을 기록한 금서 ‘양주십일기’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을 한 편의 짧은 환상소설 속에서 근사하게 풀어낸다. 피식 웃다가 다시 울컥.


“과거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이고, 그래서 권력을 쥔 자들은 언제나 과거를 지우고 침묵시키려 해. 원혼들을 땅속에 묻어 버리려고. p458”


#수록작모두좋아요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 #독특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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