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Dec 16. 2022

쎄하면 엎어라

<식물이 아프면 찾아오세요>, <식물, 같이 키우실래요?>


파키라가 무름병으로 고생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목대 세 개짜리 파키라는 결혼하고 처음 산 식물이었다. 반려식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부터 현재의 거주지로 정착하기까지 용케 잘 버텨내어 이제 딸아이보다 더 나이 먹은 이 애가 내 최초의 반려식물이나 다름없다. 목대 세 개 중 하나는 살려낼 가능성이 없어 뽑아 버렸고, 멀쩡해 보이던 녀석마저 줄기가 마르고 이파리가 노랗게 시들어가 결국엔 화분을 뒤엎기로 했다. 대형화분으로 기세좋게 분갈이하고 일년만에 벌어진 일이다. 

“쎄하면 엎어라.” 


식물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말이라는데, 올여름 이파리들이 낙엽 지듯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던 그때, 그래, 그때 엎었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식물인이 아닌 나는 무지와 두려움으로 엎질 못했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두 개 모두 뽑아 뿌리를 살펴봤다. 보기만 해도 물컹하게 짓무른 데가 있었고, 긴가민가 꾹꾹 눌러보다 손톱으로 살살 파내보면 누렇게 물러가는 속살이 그제야 드러나기도 했다. 미루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 쓰던 식칼을 깨끗이 세척하여 어린애 팔뚝만한 뿌리를 밑에서부터 잘라내기 시작했다. (아, 이걸 어쩌지, 도대체 널 어쩌지, 긴장감에 손끝이 살짝 저려오는데, 가지치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살아있는 전복을 난생 처음 손질했을 때와 비슷한 손맛이랄까.) 하얗게 멀쩡한 속살이 나올 때까지 잘라내다보니 목대가 지나치게 짧아졌다. 과연 뿌리가 다시 돋을까. 물에 담가놓고도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 모든 과정에 시작부터 함께한 책들이 있었다. (사실 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유튭 영상도 찾아봐야 했고 그 와중에 알고리즘에 낚여 밤이 깊어지도록 엉뚱한 데 홀려 있기도 했다...)

도서관 서고에서 나름 선별한 책들이다. 


독일카씨의 식물처방전, <식물이 아프면 찾아오세요>


제목부터 참 든든하지 않나. 비록 무름병 걸린 내 파키라는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대신 알로카시아(가 응애와 과습에 매우 약하다는 것, 추위에 약하니 겨울에는 베란다에서 실내로 옮겨둘 것), 장미허브(의 외목대 만들기)에 대해 배웠다. 작년에 전문가의 손을 빌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녹보수가 금전운이 들어온다 하여 별명이 ‘대박나무’라는 걸 알고 웃었다. 현재 우리집에서 가장 풍성한 자태를 자랑한다. 잘 키워야지. 

 

일단 목차에서 자신의 반려식물을 찾아 증세를 살피면 된다. 식물마다 생기기 쉬운 대표적인 병증과 케이스별 처방, 기본 정보, 분갈이법과 구체적인 관리 비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한번씩 내 손을 거쳐 명을 달리했던 식물들과 조우할 때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더 꼼꼼히 읽었다.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물론 내 똥손을 탓하는 마음도 버리진 못했다. 생명을 키워내는 손은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 자신에 대한 불신 같은 게 있었다. 이렇게 낙심하는 내게 십중팔구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준 건,   

   

블랙죠의 가드닝 노하우, <식물, 같이 키우실래요?>

     

식물 키우기의 80%는 환경이 좌우한다고, 그러니 식물을 키우기 전에 주거공간을 살피고 환경과 식물과의 궁합을 살펴보라고 조언한다. 


앞서 소개한 책이 아픈 식물을 위한 책이라면, 이 책은 식물을 키우려는 식집사를 위한 책이다. 


식물 생장의 기본 원리, 식물 키우기의 기본(물 주기/분갈이/흙/비료), 삽목과 삽수, 수형 만들기(가지치기/외목대), 알맞은 환경 조성과 내 환경에 맞는 식물 고르기, 병충해, 환경/성향별 식물 추천 등 구성과 내용이 알차다. 식물 가드닝 입문서이자 식집사 필독서! 


그런데 이 책에도 파키라는 나와 있지 않았다. 딱히 조언도 필요없는 난이도 최하의 식물을 나는 지나친 관심과 과욕으로 말려버린 거다. 파키라가 과습에 취약하다는 걸 몰랐다. 그간 내 파키라를 무탈하게 키워낸 건 내 정성이 아니라 무정성이었다. 분갈이를 게을리한 탓에 매번 목대 크기에 적당히 맞춤했던 화분과 내 적당한 무관심. 


작년에 욕심껏 대형화분으로 분갈이한 뒤 파키라는 무섭도록 자라기 시작했다. 손바닥 모양의 이파리가 J의 얼굴을 덮을 만큼 커졌고, 밑동에서 새로운 줄기들이 쑥쑥 돋아났다. 이전까지는 존재감이 가구 같았던 파키라의 놀라운 변신 앞에 세 식구의 시선과 걸음이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물주기와 가지치기 주기가 짧아졌다. 신이 나서 쌀뜨물까지 챙겨줬다. 그땐 몰랐다. 지나치게 빠른 성장이 과습을 알리는 경고였음을, 내가 퍼부은 애정과 관심 속에서 뿌리부터 짓무르고 있었음을, 이파리가 노랗게 시들어가는 게 물부족 탓이 아니라 과습으로 상한 뿌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였음을, 심지어 수경재배로 키울 만큼 물을 좋아하는 스킨답서스도 흙에 심어 키울 때는 과습을 주의해야 함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어디서든 잘 자라서 순한 식물의 대표라는 스킨답서스 두 개마저 뿌리가 상해 물병으로 옮겨놨다...

 

#애정으로물먹여서

#미안하다얘들아... 

 


매거진의 이전글 오백 원어치의 외로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