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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4. 2022

오백 원어치의 외로움

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온종일 어둑했다. 어둑한 기분이었다. 창밖은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세번 걸음했다. 박스들 포개 들고 발밑 보고 걷다가 수거장에 도착하니 뭔가 불편한 낯을 한 노인이 비닐들로 가득찬 비닐 속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분리수거를 모두 끝내기까지 주위를 서성이던 노인은 어떤 볼일이 그제서야 끝난 건지 혹은 생긴 건지 마침내 비스듬히 길을 가로질러 자리를 떴다.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흐린 날에는 세상이 더 고요하게 느껴지지만, 그건 순전히 내 기분 탓일지 모른다. 한시 넘어 일찌감치 저녁거리로 오징어 두 마리를 손질했는데, 세탁실 창 너머 어린 아이들이 웃음 터뜨리며 소리질렀고, 놀이터에서 높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뭔가에 지나치게 흥분한 새들이 재잘거리는 것 같다 생각했다. 몇년 간 버려지다시피한 놀이터로 되돌아온 소리에 오래 귀기울였다. 귀 기울이면 고요함은 바깥에 있지 않다. 그러니 기분 탓일 것이다.


오징어는 남동생이 낚시로 잡았다 했다. 먹기 전이지만 맛있게 먹었다고 미리 문자를 보낼까 생각만 했다. 오늘 J는 야자를 하고 남편은 배드민턴을 하는 날이라 평소보다 늦게 귀가한다. 간혹 두 사람 모두 저녁을 밖에서 먹고 오면 할 일을 덜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오늘은 뭘 먹지, 이십년째 고민을 하고 있다. 


오후에는 이석원 산문집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을 읽었다.


그가 외로워서 택시로 500원어치 더 갔다는 말이 사무치는데, 그러고 보니 남편과 J와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면 내가 입을 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요 몇년 간 자의 반 타의 반 모든 모임을 끊어내고 안전한 굴속에 은거하다시피 한 뒤로는, 두 사람이 아주 늦게 귀가하게 되면 몇 문장도 채 말하지 않고 보내는 하루도 있었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 에세이를 부쩍 가까이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사람을 '안전한 거리'에 두고 만나는 일과 같아서인지도 모른다. 신경쓸 필요 하나 없이, 상처와 오해와 갈등의 여지가 전혀 없는 평온한 거리에서, 나와는 다르고도 닮은 일상과 목소리에 어떤 수고로움 없이 귀 기울이다 독서일기 몇 자 써내는 것으로 '사람'과 '대화'가 일정 정도 차지해야 할 몫을 채워버린다.


그러다 보니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예상치 못하게 봇물이 터져버리는 거다. 가령 얼마 전 미용실에서라든가(생생한 갱년기 경험담과 뼈때리는 조언에 너무너무 솔깃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떠들다가 목이 쉬어버린다든가(장소가 지나치게 시끄럽긴 했는데, 하긴 우리 나이에 홍대가 웬 말이냐 싶)...


좋은 산문집을 읽게 되면 좋은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 같아 좋다.



#오늘의 장면


택시

"요즘 속 얘기 하나 편히 할 사람 찾기가 쉽지 않으니 웬일일까. 어제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가 외로워서 500원어치를 더 갔다. 기사 아저씨가 택시 모신 지 얼마 안 됐다는데 우리 누나들 연배여서 말이 좀 통했다. 세상에, 택시 기사랑 말 통하는 것처럼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평생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니."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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