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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Apr 06. 2023

"숨겨진 주름을 마주할 때"

나희덕, <예술의 주름들>

"숨겨진 주름을 마주할 때 작품은 한 편의 시처럼 피어난다." - 나희덕



어제는 칼퇴근한 남편과 수험생 딸의 손을 잡아끌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내일은 비가 온다 하니 오늘을 놓치면 안된다고, 가장 아름다운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우리는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씩 손에 들고 꽃그늘 밑을 걸었다. 가로수 태반이 벚꽃이라 이맘때 우리 동네는 온통 분홍분홍하여 잠시 시선을 주는 것으로도 마음에 화사한 기쁨이 차오른다.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부고를 접하곤 허리를 곧추 세웠다. 


January 17 1952~March 28 2023


유족이 공식인별에 올린 짤막한 부고를 가만히 보는데 콧등이 시큰해졌다.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그런 소리를 내내 동경해왔다”는 사카모토의 고백과 그의 <async> 공연영상에서 눈발이 날리는 장면과 함께 낭송되었다던 타르코프스키의 시는 나희덕 시인의 예술비평에세이 <예술의 주름들>에서 발견했다. 시인의 가슴에 와 박힌 싯구절은 이렇다. 

“꿈과 현실과 죽음도 파도 따라 가리라.
나는 무릎꿇고 고아처럼 간절하니...”


허망함이 큰 건 그가 보여준 아름다움이 커서이겠지. 그의 소리는 약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 것이다. 



<예술의 주름들>은 작년 초여름에 읽기 시작하여 올봄의 초입에 재독했다. 완독하는 데도 다시 읽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숨겨진 주름’이 많아서 그랬나 보다. 


“자연을 중심으로 한 생태적 인식과 실천”, 

“여성주의적 정체성 찾기와 각성의 과정”, 

“예술가적 자의식과 어떤 정신의 극점”, 

“장르와 문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 

“시와 다른 예술의 만남”.


이들 다섯 개의 큰 주름마다 나희덕 시인의 시적 세계와 공명한 여섯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소개된 도합 서른 명의 예술가들과 더불어 언급된 이름들 태반이 낯설어 작품들을 따로 찾아보며 읽었다. 



작년 여름에는 사카모토의 2017 앨범 <async>를 독서와 수면 플레이리스트에, 윤형근 작가의 <다색 Burnt Umber 1980>을 노트북 배경에 넣었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나를 열면 해변이 있을” 거라는 말이 하도 좋아서 ‘나를 열면 바다가 있을 거’라고 한동안 마음에 새겨넣고 다녔다. 몇년 전 우연히 보았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영상<The Artist Is Present>은 연인들의 우여곡절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봐도 여전히 울컥하게 했고, 케테 콜비츠의 ‘검은 피에타’ 청동상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와 한설희 작가의 사진집 <엄마, 사라지지 마> 흑백사진 속 노모의 모습들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다음 이야기로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나희덕 시인이 영화 <타인의 삶>과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시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을 연결시켜 “아름다움이란 늘 바깥에 있는 어떤 것,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라고 짚어낼 때, 조동진의 노래는 ‘들려온다’기보다는 “대기가 가장 아름다운 때의 빛깔과 냄새와 물기를 머금고” ‘불어온다’고 말할 때, 그녀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영화, 행위예술, 음악, 미술, 연극, 비평, 시 등 장르를 넘나들며 시인이 조우하고 감응한 결과물을 시인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들려주는데, 이 감상들이 뒤섞일까 봐 한 번에 한 두편씩만 읽었던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일 것이다. 2부에 수록된 한설희 작가 편이 가장 좋았고, 편애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있던 3부를 여러 번 읽었다. 칸딘스키 편은 다시 읽어도 어려웠다. (뜨거운 추상과 회화의 화성학적 미래...를 언젠간 이해할 날이 오려나... 싶지만 칸딘스키 전시회를 가게 될 것 같진 않아서 그 미래는 오지 않을지도...) 


윤형근 작가를 알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한 생명을 불태운 흔적으로서, 살아 있다는 근거로서, 그날그날을 기록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깊고 고요해진 검은 빛을 보며 떠오른 시 한 편, 김현승의 "검은 빛"을 윤형근의 그림 앞에서 천천히 읊조려본다. p178


그에게 드로잉은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나 스케일보다는 대상을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한 장르다.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는 것, 이를 위해 사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봄으로써 대상 자체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
(...)
드로잉을 이런 발견적 행위로 정의한다면, 근원과 존 버거가 말년까지 드로잉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김용준과 존 버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맴화와 붓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린 꽃은 동양적 미의 표상인 매화와 서양적 미의 표상인 붓꽃이라는 기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대상 앞에서 그 불가해한 어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맨몸의 궤적이야말로 그들이 작은 스케치북에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p218-219


https://www.youtube.com/watch?v=XO_7PMMua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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