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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y 19. 2023

"가벼움은 어디에나"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


작년 가을께 골라두었던 책을 3월에 읽었다. 돈 드릴로 이후 처음 맛보는 고양감! 보뱅이 쓰는 언어와 언어를 쓰는 방식, 그 언어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완전히 홀렸다. 드릴로와는 아주 다르지만 비슷하게 전율이 일어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책에 시선도 못 줬다. 그녀의 다음 책도 좋다면 전작을 읽게 될 것 같다. 


어떤 작가는 일상적으로 쓰이던 평범한 단어 혹은 표현에 매력적인 한 인물의 삶을 통째 바치는 것으로 독창적인 아우라를 부여한다. 새로이 만들어진 인상은 지극히 강렬하여 그간 익숙했던 의미, 이미지, 쓰임새를 가뭇없이 덮어버린다. 


내게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이 그러했다.

 

이런 마음은 무엇에 가까울까. 자유? 아름다움? 빛? 음악? 모르겠다. 가벼운 마음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아. 주인공 뤼시도, 그녀의 사랑도, 삶도, 그녀가 세상을 보는 시선과 살아가는 방식, 이 모든 것이 ‘가벼운 마음’ 그 자체라서.

  

읽는 내내 모처럼 짜릿하고 설렜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두 살, 두 살 반인 나의 눈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눈동자를 지나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구멍을 파고, 소굴을 짓고, 은신처로 삼는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시간에도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 무엇도 그 자리를 대신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무엇도 그렇게 멀리 내려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두 살 때 가장 자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내 사랑의 여정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의 연인들은 그 누구도 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며, 결코 그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첫사랑은 늑대다. 털과 냄새와 상앗빛 누런 이빨과 미모사 같은 노란 눈, 산처럼 풍성한 검은 털에 노란 별빛의 반점이 있는 진짜 늑대.” p9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이 오거나 안 오는 건 때에 따라 다르다. 설령 오지 않을 때라도, 가벼움은 그곳에 있다. 이해가 가는가?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속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 청색, 연청색, 청자색을 입히는 섬세한 붓질에,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 땅바닥에서 ‘팡’하고 터지는 밤껍질 소리에, 꽁꽁 언 호수에서 미끄러지는 개의 서투른 걸음에. 이 정도로 해두겠다. 당신도 볼 수 있듯,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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