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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n 27. 2023

시대의 공포

닉 드르나소, <사브리나>


닉 드르나소의 그래픽노블 사브리나를 읽었다.  


이 책을 추천한 동생에게서 페이지터너라는 정보 하나만 받고서 쟝르와 정서를 대략 짐작하게 해주는 책의 뒷날개도 어쩐 일로 살펴보지 않은 채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여러 번 뒷골이 세게 당겨왔다. 무서운 이야기다. 세상이 무서워지고, 사람들이 무서워진다. 


이야기는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사브리나는 부모의 집에서 모처럼 동생을 만나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동생은 자신이 처음 홀로 감행한 여행(도중에 불쾌한 일도 겪어 그다지 낭만적이지만은 않지만 일면 평범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언제고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사브리나는 잠시 망설이지만 수락하고, 그들은 그렇게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나갈 방향을 어림짐작하고 말았던 거다. 첫번째 삽화가 그려내는 이 안온한 일상과 정적이며 단조로운 그림톤으로 내 마음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이야기는 갑자기 사브리나의 애인에게로, 그가 도망치다시피 떠난 여행으로 점프한다. 이 첫번째 점핑에서 이야기는 내가 예상한 행로를 완전히 벗어난다. 이야기는 그 후 몇 번의 점핑을 감행한다. 중심 화자가 몇 차례 바뀌고, 사브리나는 배경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제목과 함께 커버 전면에 드러난 인물은 사브리나. 그녀의 존재는 무겁게 깔린 구름장 너머의 흐린 해처럼 이야기 전반에 드리워져 있고, 독자인 나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그 존재감을 떨쳐낼 수 없다. 아마도 이야기 속 몇몇은 평생 그러하겠지. 


첫번째 예상이 어그러졌을 때 그제야 조금 놀란 마음으로 작가를 살피고 뒷날개에 실린 추천사를 읽었다. 박찬욱 감독과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사를 미리 읽었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준비한다고 이야기가 주는 충격을 피할 수는 없었을 거다. 도중에 책을 덮어버리지 않는 한. 이야기가 들려주는 시대의 공포에서도 도망갈 수 없다. 우리를 유기적으로 잇고 있는 신경망을 완전히 끊어내지 않는 한. 


유독한 불안과 공포에 전염되기란 이토록 쉽고, 순식간에 집단망상으로 번지는 건 일도 아니며, 어떤 이들은 불안과 공포를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으로 해소하고, 아주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진실을 찾겠다며 또 다른 폭력을 가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어느 시대에나 벌어져왔고, 다만 폭력으로 발현되는 양상만 바뀐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암울해지는데. 이래서 박찬욱 감독이 경고로 점철된 추천사를 남겼나. '읽지 마라, 권하지 마라, 읽지 못하게 경고하라' 같은 메시지는 책을 더 읽고 싶어지게 하겠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곤 멍해져 있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장면이 이야기 바깥으로 이어지는 듯한 마냥 푸르고 평온한 풍경이었는데, 그게 왜 그렇게 비현실적이던지.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고서 작가와 책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 보았다. 그래픽노블로는 맨부커상 최초로 후보에 올랐다고. 


얼마 전에 발견한 체호프의 문장이 떠올랐다.

 

“예술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훌륭한 예시가 될 것 같다. 현시대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하지만 놀랍도록 절제되고 건조하여 더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이야기는 작가의 사적인 작은 불안에서, 그 불안에 점점 집착하게 된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작은 씨앗을 이렇게 거대하고 음습한 세계로 확장시킨 솜씨에 굉장히 감탄했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스포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너무 많은 걸 떠들어대고 말았다. 놀란 마음에 그러고 말았다. 이 얼얼함을 나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https://youtu.be/CiURhOYk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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