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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n 28. 2023

삶을 단정한 모양새로 애써 지키려는 마음

최다정, <한자줍기> 


최다정 작가의 산문집 <한자줍기>를 읽고 있다. 


마음이 여유로운 날이면 소개된 한자를 필사노트에 옮겨 적는다. 살구색 노트에는 이름도 달려 있다. ‘(한 시절의 자화상을 그리는) 한자 줍는 여행’. 책을 샀더니 기대치 않게 필사노트가 딸려 왔다. 신이 나서 첫 글자는 붓펜으로 적었는데 페이지를 가득 채운 이후에야 펜을 잘못 선택했음을 알았다. 종이가 얇아서 뒷면에 내가 쓴 글자들이 훤히 비쳐 그 페이지에는 제대로 필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만년필을 비롯하여 두세종류의 펜을 시도해보다가 결국 4b연필에 정착했다.


문인학자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작가님. 단어 하나에서 뻗어가는 글의 깊이, 자신과 세상, 오랜 문우들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 학자로서 열렬한 태도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저 읽는 것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듯 느끼게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내게는 그러했다.


아끼면서 한 편씩, 아무데나 펼쳐서 눈을 사로잡는 단어를 골라 읽고 있다. 한 편 읽는 데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지만, 쫓기는 마음이 들 때는 부러 피한다. 그렇게 읽을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정성 다해 쓰여진 책은 정성을 다해 읽고 싶다. 다만 하루를 단정하게 시작하고 싶을 때면 그날 일과가 얼마나 빼곡하든 이 책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런 날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말인즉슨 아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올해 내 소박한(남편과 J가 보기엔 아주 원대하다 할지 모를) 소망은 그런 아침을, 그렇게 단정하게 시작하는 하루를 좀 더 많이 맞이하는 것이다.




오늘은 ‘潔癖: 결벽에 약이 필요할 때면’을 읽었다.


"옛날 사람들을 탐구하는 여정 중엔 결벽을 지녔던 문인학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그들의 결벽은, 모난 데 없이 정갈한 글씨체에,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살뜰한 태도에, 자신의 공간을 정돈하는 방식에, 긴절하게 애쓰는 모양새로 묻어난다. 문학과 학문을 향한 어느 선비의 결연하고 곧은 다짐이 그의 생을 피로하게 했을 테지만, 덕분에 세상을 치밀하게 통찰했던 다정한 시선은 글에 온전히 담겨 지금까지 전하게 됐다. 천년 전에도 창작하고 공부하는 마음은 쉽지 않았으나, 그런 마음들끼리 세월을 관통해 연대할 수 있기에 문학과 학문은 아름답게 이어져 왔다.” 140


내가 주목한 단어는 결벽보다는 ‘緊切긴절’. 한자가 나와있지 않았다면 간절의 오타인가 생각했을지 모를, 혹은 요즘 내가 자주 그러듯이, 그렇게 잘못 읽었을지도 모른다. (작년부터 부쩍, 머릿속의 단어를 엉뚱한 단어로 바꿔 내뱉거나, 잘못 듣고 읽는다. 어제는 계엄군이 어쩌구 하는 말에 “뭐, 대원군이 그랬다고?” 뻘소리를 해서 J를 웃겼다. 나는 웃지 못했다. 내 언어회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정갈한 글씨체”,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살뜰한 태도”, “자신의 공간을 정돈하는 방식”. 결벽도 격이 있구나. 옛 문인의 결벽이란 얼마나 격조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긴절하게 애쓰는 모양새로” 결벽을 드러낸다고 했다.


긴절. 한자를 찾아봤다. ‘긴하다/팽팽하다/굳다’를 뜻하는 ‘긴’은 ‘어질다/굳다’의 ‘현’과 실 ‘사’로 구성되어,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실의 급박한 모양새’를 표현한다. 그런 모양새를 끊어내는(절) 것. 절박하고 아주 급하고 꼭 필요한 마음을 끊어내는 모양새로 결벽이 드러난다니... 결벽에 절제까지 더해지니 참 품위 있는 결벽이다, 얼핏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긴절하다는 ‘매우 필요하고 절실하다’라는 뜻이다. 유의어로 요긴하다, 긴요하다, 절실하다. 그러니까 ‘절’의 여섯번째 의미인 ‘절박하다’로 해석해야 한다. 절박하게 필요하다, 필요하여 절박해지다, 이렇게 애쓰는 자세로 그들의 결벽을 드러낸다니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준다. 이쪽은 그들의 마음가짐과 생활태도에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자신을 단정하게 유지하고자 애쓰는 마음.


품위있는 결벽이든 노력하는 결벽이든, 자신을 잘 다스리려 했던 문인들의 모습이 드러나서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어의 조합을 풀어내고 한 글자씩 해체하여 그 뜻을 상세하게 살피는 과정이 의외로 재미있다. 이런 재미를 어린 시절에 알았다면 내 어휘력이 좀더 풍부해졌을 터인데... 그땐 한자공부가 정말이지... 


오늘의 공부는 ‘潔癖(유난스럽게 깨끗한 것을 좋아함)’, ‘緊切하게’, 그리고 삶을 단정한 모양새로 애써 지키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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