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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n 30. 2023

첫 나무

이갑수, <나무와 돌과 어떤 것>


요즘에는 여러 책을 나란히 읽고 있다. 어떤 책은 공부 삼아, 어떤 책은 마음 수련 삼아 읽는다. 재미 삼아 읽는 책도, 감각을 고양시키려 읽는 책도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욕심껏 읽어대는 걸 보니 책태기는 끝난 것 같다.



<나무와 돌과 어떤 것>


공부 삼아 읽는 에세이. 나무 공부다. 돌과 어떤 것까지 느끼려면 아직 멀었다. 띄엄띄엄 읽고 있어서, 나무 몇 그루만을 눈에 담았다. 매일 한 그루씩, 나무를 들여다보는 일생이라니, 근사하다 생각했다. 그런 삶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나무들 사이를 고요하게 거니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양버즘나무’가 플라타너스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버즘나무도 있겠네? 검색해보니, 있었다. 가로수로 흔히 보이는 플라타너스는 대개 양버즘나무이고, 버즘나무와 가장 큰 차이는 열매의 개수 정도라는 걸 기억해두기로 했다. 양버즘나무는 열매가 한두개, 버즘나무는 3-5개. 수피가 얼룩덜룩하게 벗겨지는 모습이 버짐(버즘) 핀 것 같다 해서 개화기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서울의 가로수들 중 두 번째로 많이 심겼다는 건 이 책에서 알았다.


© László Hidasi on Unsplsh


저자가 어린 시절의 우람한 양버즘나무에 대한 추억을 되짚다가 고향에서 멀어지며 살아왔는데도 결국 양버즘나무 잎사귀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하던 대목에서, 내게 각별하게 남은 나무 두 그루가 떠올랐다.


하나는 어릴 적 초등학교 후문에 심겨 있던 똥낭.


‘낭’은 제주어로 나무라는 뜻이다. 어른들과 달리 우리는 돈나무라 불렀다. 거대한 파라솔처럼 무성한 가지를 사방으로 펼친 나무를 기억한다. 그 진초록빛 그늘 아래에 여자애들이 쭈그려 앉아 공기놀이를 하던 장면까지. 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일고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던 것도, 두 팔로 얼굴을 막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 바람과 먼지가 잦아들자 다시 주저앉는 모습 또한. 서늘한 그늘의 냄새. 그 청량함 속에 흙먼지 냄새가 깨알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작고 동그란 초록 이파리들. 내가 난생처음 나무라는 존재를 인식했던 날의 풍경은 이다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똥낭이 내 첫 나무다. 하필 인생 첫나무의 이름이 똥낭이네. 고향집에 가면 사진을 찍어둬야겠다. 어린 조카들은 그 나무가 심겨진 후문을 통해 학교를 드나들 것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공기놀이는 하지 않겠지만. 


© sd wang on Unsplsh

또 다른 나무는 메타세쿼이어.


이 나무와의 첫 만남은 기억하지 못해도 첫 악수를 나눈 날은 기억하고 있다.


면역체계가 고장나서 몸이 이런저런 증세를 보일 무렵,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도서관 계단을 내려가다말고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기우는 걸 바라봤다. 주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길래 가장자리에 붙어서다가 이편으로 휘어청 뻗은 나뭇가지에 얼굴이 닿고 말았다. 마치 어루만지는 듯한 나뭇잎의 촉감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이상스레 좋아졌다.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나는 나뭇잎이 여러 장 매달린 가지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쥐어봤다. 네 기운을 나한테 좀 나눠줘 볼래,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악수하는 사이가 되었다. 안녕하니, 나도 안녕하다. 나만 홀로 나누는 대화이지만, 그렇게 살짝이라도 나무와 닿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졌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몇 년 만에 도서관을 찾았더니 더는 악수하기 힘들 만큼 나무는 훌쩍 자라 있었다. 어머,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지르고 말았다. 시멘트벽에 붙어 자라 비좁을 텐데 위로 잘 뻗고 있었다. 그새 둥치도 제법 굵어지고 잎은 얼마나 무성해졌는지. 정말 기특하다! 내가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뿌듯하지! 그러다 당연하지 않냐고, 내 벗이니 잘 자라서 기쁜 게 마땅하다고, 이제 더는 쓰다듬을 수도 없으니 그저 내 기쁜 마음만 전했던, 그런 날이 있었다.


그날을 떠올리게 한,

“양버즘나무, 버즘나무과의 낙엽 교목.”


책을 여는 글


1. 이렇게 독서일기를 쓰다가 제목의 ‘어떤 것’을 짐작해보았다. 어떤 나무를 말할 때 따라오는 어떤 기억도 그 중 하나이겠지.

2. 특수양장본. 커버가 제법 도톰하고 빳빳한 한지다. 표지 촉감이 나무 껍질이나 조약돌의 거끌거끌한 표면을 쓰다듬는 듯하여 마음에 든다. 제목과 저자 이름의 필체, 새겨진 위치까지 단아하다.

3. 돈나무는 돈나무과의 상록 활엽 관목.

 메타세쿼이어는 낙우송과의 낙엽 침엽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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