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싶을 때
불쑥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책상이 꽃가루로 뒤덮혀 노르스름해진 걸 발견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손을 대면 금세 바스라져 가루로 날릴 것 같은 흰 갓털도 눈에 띄었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자 갓털은 마우스 근처까지 굴러왔다가 순간 공중에 떴고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미 책상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재채기를 했다.
하늘과 경계를 이룬 숲의 끄트머리가 연푸르게 변해 있었다. 나는 오래 바라봤다.
계절은 깊어지고 있다.
나는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더는 활자를 쫓아가지 못한다. 아직도 내 눈에는 계절의 풍경이 맺혀 있다. 한숨을 작게 내쉬며 책을 덮는다.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를 느끼는 감수성의 역사.' 제목도 제목이지만 이 매력적인 부제에 이끌려 순전히 읽기 시작했다. 책은 이제껏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날씨를 인간적 관점에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통해 다루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오늘의 날씨를, 그리고 그걸 예민하게 감각하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내 속의 무언가가 달라졌다.
책을 읽는 동안이었을까. 아니면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이었을까.
노트북을 펼쳤다.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라는 문장을 썼다. 그러다가 언젠가 문학팟캐스트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고 나는 천천히 백스페이스키를 두드려 글자들을 지웠다.
그는, 그 소설가는 말했다. 날씨로 소설을 시작하지 마라. 그런 글은 너무 흔하다. (덧붙여서 그는 '꿈'으로도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비와 빛과 바람, 눈과 안개와 뇌우. 날씨는 마음을 들쑤시거나 어지럽히고, 심지어 내가 머물고 있는 물리적 공간조차 바꿔놓는다. 말하자면 '기상 감수성'의 힘이랄까. 지붕을 없애고 벽을 허문다. 마음은 이미 비에 젖고 빛에 물들며 바람에 흔들린다. 눈으로 얼어붙고 안개로 아득해지고 뇌우로 동요한다. 그렇게 일상적 자아에서 "기상적 자아"로 손쉽게 몸을 바꾼다. 그렇게 몸을 바꾼 이들 가운데 격렬하고도 서두르는 몸짓으로 붓이나 펜촉을 적시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날씨의 맛>에서 알랭 코르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외부 세계에는 눈이 가려진 채) 각자 내면의 세계로부터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상상하고 창작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이 예술은 세상만사를 '탄생시킨다'.(p188)
어쩌면 내 모든 글, 혹은 그림까지도 그날의 비와 빛과 바람, 또는 눈과 안개와 뇌우에 기대 쓰여졌고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그게 나만은 아닐 것이며, 바로 그 점을 그 소설가는 주의시키고 싶었을 것이지. 문어로 구축된 세상에서 클리셰만큼 경계해야할 것은 없으므로.
하지만 날씨만큼 자신에게로 직행할 수 있는 통로가 또 있을까. 일상세계를 뒤로 한 채 서정의 세계로 진입하게 하는 통로. 때로는 그 통로가 발휘하는 힘이 강력한 나머지 통로 자체가 상징적 세계가 되기도 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화가와 시인이 안개의 존재와 매력을 알려준 뒤에야 사람들은 안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스티븐 킹의 <미스트>와 김승옥의 <무진기행>, 박찬옥의 <파주>를 보고난 뒤에야 사람들은 스티븐 킹과 김승옥과 박찬옥의 안개를 구별해내며, 우리는 이제 다른 눈으로 안개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템스 강의 연무는 모네가 "변모하는 세계의 정수를 파악하려" 고심하게 하고, 모네의 이런 작업은 수십년 뒤 일본 조각가 나카야 후지코로 하여금 "물, 공기, 바람, 시간을 가지고 유희하며 거기서 나오는 안개로" 이뤄진 최초의 조각품을 만들게 한다. 후지코의 연무 속을 거닐고 온 사람들은 당분간 안개낀 세상을 맞닥뜨릴 때마다 후지코의 안개를 떠올릴 것이며 그들이 의식하지 못했어도 거기에는 모네가 포착하려 했던 템스 강의 연무 또한 흘러들어가 있다.
날씨는 예술을 탄생시키고, 예술은 날씨를 재탄생시킨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날씨는 일상에 무뎌진 감성을 일깨우는 뮤즈이자, 우리를 새로운 세계(어쩌면 '서정적 자아'라는 잊혀진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이며, 때때로 우리 앞에 포즈를 취한 채 새롭게 해석되길 원하는 모델이라고.
어쨌든 나는 소설이 아니라 독서일기를 쓰려 하고 있다. 책상을 쓸어낸 손바닥에 노랗게 묻어난 꽃가루. 보푸라기처럼 하늘거리는 씨앗의 흰 갓털. 햇빛이 닿는 곳마다 연푸르게 돋아난 이파리. 정수리와 어깨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 때때로 책장과 갓털과 꽃가루를 날려 재채기를 터뜨리게 하는 미적지근한 바람. 훗날의 내게 오늘의 독서감각과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건 역시 날씨다. <날씨의 맛>이라는 책을 읽던 날의 날씨. 이 책을 통해 인식하게 된 내 "기상학적 자아"가 날씨의 맛을 섬세하게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다시 글자를 입력한다.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나는 오래 바라봤다. 하늘과 경계를 이룬 숲의 끄트머리가 연푸르게 변해 있었다.
불쑥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자 갓털이 마우스 근처까지 굴러왔다가 순간 공중에 떴고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미 책상 너머로 사라졌다. 손을 대면 금세 바스라져 가루로 날릴 것 같은 흰 갓털도 눈에 띄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책상이 꽃가루로 뒤덮혀 노르스름해진 걸 발견했다. 나는 다시 재채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