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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7. 2023

하나이자 모든 것

정우현, <생명을 묻다>

#정우현 #이른비 #생명과학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


2022년 8월 15일의 독서일기


발코니 너머 여름 숲은 풍성하고 조밀하다. 숲 그늘이 나날이 짙어진다. 동트기도 전에 새들이 와글거리고, 태양빛이 강렬해짐에 따라 거세지는 듯한 매미들의 고함소리, 땅거미 지면 우거진 수풀마다 곤충들이 날개 부비는 소리 들로 여름 대기는 항시 꽉 차 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여태 숨죽이고 있었다는 듯, 이제 여기 있다고, 나를 알아봐달라고, 여기 있는 바로 나를, 나만을 봐달라고. “저게 어떻게 구애의 소리가 될 수 있지?” J가 지극히 인간적인 목소리를 내며 창문을 닫자 귓전에 대고 악을 지르는 듯 떠밀려오던 소리들이 뚝 잘려나간다. 저 정도 데시벨이면 단속대상감이라며 다분히 인간적인 의견을 내지만, 몇년 전의 J는 달랑 이삼주 울다 간다고 “매미 불쌍해”, 울상짓던 어린이였다. 하긴 그것도 인간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몇년 전 이 집으로 이사오고 계절과 계절의 마디들이 한결 도드라졌다. 나는 그 불거진 마디들을 볼 수 있었고, 듣고 매만질 수 있었다. 아마도 저 숲 때문일 것이다. 숲의 계절은 각기 다른 감각을 앞세워 자신을 드러내는데, 여름은 단연코 소리가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존재를 알린다. 살아 있음을 있는 힘껏, 열렬하게. 저 숲에 저리도 많이 살고 있었나. 어떤 저녁에는 그늘진 풀숲 속사정을 그려보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간의 침묵조차 강렬하게 느껴지는 여름이다.


며칠 전 어쩌면 이 계절에 가장 어울릴지 모를 책 하나를 책장에 보탰다. <생명을 묻다>. 생명에 관한 거의 모든 질문(따라서 생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모든 학문은 ‘타우마제인’, 즉 ‘경이’를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면, 이 책(혹은 이 책의 독서)는 ‘생명의 경이’를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 라고 해도 될는지. 그러니 여름에 시작하기 퍽 좋은 책이다.


목차를 보면, 생명에 관한 열다섯 가지 화두가 세 가지 질문으로 크게 묶여 있다. 이 질문은 고갱의 유명한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존재론적 질문들이지만, 이 책은 철학서나 종교서가 아닌 생명과학 교양서이다. 하지만 신화와 문학·예술까지 자유로이 오가며 주제를 탐색한다. 작가님의 독서이력으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방대한 지식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어쩌면 이 화두들이 그간 작가님이 가로지른 책의 망망대해에서 돛이자 닻이며 방향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그간의 내 책태기는 독서의 동력원이 되어주는 이런 화두를 잃어버린 데도 그 연유가 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잠시 눈물을 훔치고, 목차로 돌아가자면)


나는 숲이 아닌 나무에, 심하게는 굵직한 밑동에서 귀엽게 움터나온 여린 싹이나 망사처럼 헤진 가을 잎사귀 무늬 따위에 시선이 팔리는 사람이라 종종 딴길로 새고 맘대로 질러가다 길을 잃곤 한다. 그래서 종착지가 멀고, 가는 길목에서 볼거리가 많은 책일수록 목차 의존도가 높다. 이 책의 목차는 뭐랄까, 맘껏 길을 헤매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들게 한달까. 잘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 오늘 내가 꽂힌 나무, 아니 나뭇잎은 아래의 인용문이었다.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의 나이가 스무 살이라느니, 서른 살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잘못되었다. 우리의 나이는 모두 35억 살이기 때문이다. (분자생물학자 귄터 블로벨) p300”


'근사하네. 앞으로 한 살 붙이고 떼고 할 필요 없이 35억살이라고 소개해야겠어. 자꾸 자기 나이를 까먹는 남편에게도 당신은 35억살이야, 말해줘야지. 아니, 엄마 없으면 혼자 잠도 못자던 애가 언제 열여덟이나 먹었나 새삼 놀라지 말고, 얘를 어떻게 험난한 세상으로 내보내지 걱정도 말자. J도 이제 35억살인 걸. 우리 예쁜 조카도. 아니, 그런데 이 어린 여섯 살짜리를 조기입학시킨다고?' 뒤통수 부여잡고 무한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곤 내가 어디서 길을 놓쳤는지 되짚었다... 그러니까 열번째 화두,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생명은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은 무엇이 결정짓는가. 그것은 인간의 전유물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아름다운 존재일까.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의 것을 희생시키는 존재는 아닌가... 하지만 이런 희생은 종내는 참혹한 결과로 인간에게 되돌아오지 않을까. 왜냐하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생명이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라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경이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사실이다. p300”


2부 <우리는 누구인가>의 마지막 질문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된 그물과도 같다.” 우리는 하나이자 모든 것이다. 칸트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좋은 것, 그러니 쓸데없다 말할 수 없는 것.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하나인 것으로 드러난 생명을 뜻하는 것.” 고작 한가닥에 불과한 생명일지라도 그물을 구성하는 하나로서, 그 존재만으로 귀하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은가.


느리게 읽어 겨울이 지극해졌을 때,

그 많은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온통 눈으로 뒤덮여 생명의 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새삼스런 의문이 다시 깃들게 될 때,


마지막 장에 도달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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