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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3. 2023

실패를 실패하기

금정연, <담배와 영화>

#시간의흐름 #영화 #에세이 #말들의흐름시리즈 


한 시간째 소강상태였던 장맛비가 다시 퍼붓는다. 창가를 마주한 2인용 소파 팔걸이 양쪽에 두 사람이 각자 머리를 괸 채 서로의 다리를 얽고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장대비가 세게 내리꽂히는 소리, 혹은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가곤 했다. 두어번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변명이 하고 싶어졌다. 저는 당신들 연애에는 관심 없고요, 다만 날씨의 추이가 궁금할 뿐입니다. 실은 당신들이 읽는 책도... 누군가 책을 읽는 걸 보면, 특히 몰입해 있는 걸 볼 때면 무얼 읽는지, 방금 밑줄 그은 문장이 무엇인지, 책에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겨 놓고 빠져 있는 생각과 수첩에 옮겨적은 글귀가 알고 싶어진다.




<담배와 영화>의 첫


나는 금정연 작가의 <담배와 영화>를 읽었고, 방금 끝냈다. 재밌었다! 페이지마다 내가 흘린 ㅋㅋ와 ㅎㅎ로 책갈피를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쟝르별로 믿고 보는 작가님이 두루두루 있는데, 이 분도 내가 기대하는 재미를 매번 안겨주신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시작에서부터, 종종, 마지막에서까지 '실패'를 운운하지만.


이쯤에서 실패에 관한 책 속 문장들을 재인용해보자면,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지금의 우리와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 페드로 알모도바르


“소설 한 편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들지 못하는 것, 실패하는 것 또는 성공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실적’이 아니라 ‘길’입니다. (...) 중요한 것은 길, 도정이지, 그 끝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에 대해 탐사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기욤 도랑주 나소 1세)” -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따라서 이 책은 실패에 대한 책이 맞다. 나는 담배를 끊는 데 실패했고 영화를 증오하는 데 실패했으며 브루스 윌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실패했다.
시간을 붙잡으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건 정말 실패일까? 내 말은, 무슨 상관이며 난들 알겠는가? 인생은 계속되는 동안 계속되는데, 이 책을 쓰는 동안 내 딸은 걷기 시작했고, 가끔은 뒷짐을 지고 걷거나 손뼉을 치며 걷기도 한다. 엄마, 아빠, 맘마, 까까, 지지, 멈무 같은 단어만 말하던 딸은 이제 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나윤아. 자기가 바로 여기 있다는 듯이. 그래, 나윤아.” p148


정지돈 작가의 <영화와 시>가 "아무래도 영화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로 시작하지만 읽고 나면 아주 다른 감상이 들었던 것처럼,

이 책 또한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라는 부제가 달려 있으나 끝에 가서 알게 되는 건 금연도 증오도 실패한다는 것

(이라고 쓰곤 문득 고쳐 쓰고 싶어졌다. 실패란 그저 다른 이름 혹은 속성으로 대체된 경험이라 생각하고 싶어서. 게다가 내가 뭐라고 실패라는 단어를 쓰나, 따지고 보니 이건 작가님 워딩. 일단 '실패한다'고 쓰고 다르게 읽기로 한다. 가령, 멈춘다, 그만둔다, 끊어버리고 내팽개치고 때려치우고...

싶다. 실은 내가. 뉴스 구독을.

요즘에는 뉴스 보기가 무섭다. 도무지 픽션 같은데 픽션이 아니라서 울적하다. 요즘의 감정일기를 훗날 요약해본다면 '인내와 정치: 혹은 나는 어떻게 인내를 멈추고 정치를 염오하게 되었나' 따위가 되지 않을까. 나도 샐리 브라운의 인생철학을 갖고 싶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How should I know? Who cares? Life goes on...). 



어쨌든, 인생이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모든 마지막은 "마지막 이전의 마지막"인 게 맞다. 그래서 작가님은 오랜 금연을 멈추곤 "마지막 이전의 마지막" 담배를 태우며 계약된 책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마지막 책인 이 책을 마무리하고, 나는 마음의 안녕을 위해 아침 뉴스를 끊고 이 모든 실망과 혼란과 염오에 실패하길 간절히 기도해보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픽션이 현실 같고 현실이 픽션 같은 인생은 계속될 터이며, 앞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난들 모르지만 뭐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진정한 마지막이 올 때까지, 그 순간에 이르러서도 삶이란 게 마치 중간에 뚝 끝나버린 영화처럼 느껴지겠으나, 어쨌든 계속해보는 것이다.



덧) 

1. 체감상 페이지마다 영화가 언급되는 것 같은데, 내가 본 영화는 손으로 꼽을 정도...

2. 이 시리즈의 다음 독서는 유진목 작가의 <산책과 연애

공교롭게도, "평소에 나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걸었다"와 같은 문장들로 시작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증오한다, 하지 않는다, 혐오한다... 내리읽은 세 권 모두 이렇게 땅땅 선언하며 시작하는데 흥미진진. 이런 '말들의 흐름' 또한 재밌네.



https://brunch.co.kr/@outofisland/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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