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Mar 16. 2023

희망없이 지속하기

정지돈, <영화와 시> 


“아무래도 영화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 정지돈, <영화와 시>의 첫     


0. 영화(와 시)에 대한 책의 첫 문장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1. 지리멸렬 지지부진해진 사이를 씁쓸하게 고백하길래 귀기울여 보니,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커플의 구구절절 열애담을 들은 기분이랄까. 자신이 좋아했던 건 이미지에 가까우며 그걸 소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매일 보긴 하지만 그냥 보는 거지, 막상 보면 졸고 있고 뭐, 그래도 진심 같은 건 있었다(고 믿었다)고 조심스레 고백하는데, 이런 말들에 결코 속을 수 없다. 애정과 진심이 없다면, 어떻게 지속적으로 좋아할지 애당초 고민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 영화와 시에 관한 지금까지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또는 그것을 포함해서) 다시 영화와 시를 좋아하는 것, 다시 건강하게 경외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p116” 


무언가에 아주 깊게, 열렬하게 빠져본 적 있는, 무언가를 “진지하게 보고 생각한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원하게 된, 하지만 앞으로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2. 이 책은 책상에 반년 넘게 놓여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줄기차게 해왔던 고민이 있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내 삶에 갖는 의미와 한때 내게 주었던 경이, 굳어버린 마음을 어떻게 회복할지, 어떻게 오래 좋아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들과 맞닿아있는 책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음을 반년 늦게 알았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깊어질수록 진위 판단이나 가치 판단이 더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 판단을 취향으로 미루는 것은 업무 유기다. 판단을 보류하는 것은 위선이거나 거짓이다. 비판을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글 속에서 은근한 방식으로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대립시킨다. 사람들은 a에 현혹되거나 a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수는 b에 있다, 는 식의 수사로 의견을 개진한다. 
어떤 예술이건 그것을 깊이 좋아하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더 많이 안다거나 더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지적인 즐거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깊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게 필요한 건 순수한 긍정과 기쁨이다.” 55


3. 순수한 애호의 세계에 머물 것. 굳이 분석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찾으려 들지 말 것. 아이가 색종이를 오리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듯이. 욕심없이 마음을 부려놓기. 사소한 ‘리얼타임’을 놓치지 말 것. 그리고 기억할 것.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 롤랑 바르트, <마지막강의>


4. 영화와 시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애호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함. 


5. 무엇보다 재미있다! 


6. <시와 산책>, <술과 농담>에 이어 세번째로 읽는 '말들의 흐름' 시리즈. 정지돈 작가의 책을 읽고 보니 금정연 작가의 <담배와 영화>도 읽고 싶어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 보니 순서가 영 엉망이다. 말들의 흐름 잡는 건 이미 글렀...      


“희망 없이 지속하기.
(...) 그러나 이게 나와 내 친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훌륭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세계에 맞서거나 세계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로( 또는 둘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 140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방향성이다. 무언가에 대한 경외심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지만 호기심은 아직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특히 세계문학전집 유에서 나오는 수많은 작품들, 문학상 수상작품들, 거장들의 신작들, 주목받는 신예들-모르는 것과 궁금한 것은 어디서든 나타난다. 모른다는 것은 몇 안 남은 축복이다. 알아가는 것은 몇 안 남은 기쁨이다. 대상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대상을 둘러싼 이미지를 통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145




https://brunch.co.kr/@outofisland/136


매거진의 이전글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듯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