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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05. 2023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듯이

존 밴빌, <바다>

2005년 맨부커상 수상작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조수가 이상한 날이었다. (p11)

                                         - 존 밴빌, <바다>의 첫 


1. 상실과 회귀 


표면적으로는 배우자의 상실, 더 깊이 들어가면 한 남자의 정체성 상실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아내의 재산으로 축조해낸 딜레탕트로서의 정체성은 그녀의 죽음이라는 파도가 떠밀려오자 모래성처럼 급격하게 허물어진다. 그를 무너뜨린 건 단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다. 자아 “변형의 매개”이자 그의 “환상을 실현하는” 수단의 상실이다. 애나가 죽자 맥스는 그녀와 살던 집에서 더는 안식하지 못한다. 소설 도입에서 그는 집으로(대체  그 “집이 무엇인지, 어딘인지” 모른 채) 돌아가는 꿈을 꾸는데, 그 꿈이 그를 오래전 여름휴가를 보냈던 바닷가로 인도한 것은 당연하고도 의미심장한 수순 같다. 왜냐하면 그 바다야말로 그가 새로운 자아의 원형으로 삼았던 한 가족을 만난 곳이며, 그가 처음으로 ‘계급성’과 ‘타자성’에 눈떴고 “자기 의식의 진정한 기원”을 맞닥뜨린 곳이기 때문이다. 딸 클레어는 그가 과거 속에 산다며 신랄하게 말하지만 이러한 회귀가 그에게는 필연적 귀결이다. 하나의 생이 무너졌고, 그는 그 생의 시발점으로 돌아간다.    

 

2. 회귀와 은둔   


딸의 질타에 맥스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부터?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자궁’, 즉 생이 시작되기 전의 안식처에서,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 어쩌면 생의 자연스러운 소멸로부터 숨는 것. 애당초 불가능한 바람을 어쩌다 그는 갖게 되었을까.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인간의 원초적 감정으로 두려움을 꼽았다. 관계와 사회를 위협하는 ‘분노, 혐오, 시기심’의 뿌리를 두려움에서 찾았고, 삶의 모든 측면(책에서는 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원초적 두려움이 다양하게 작용함을 설명했다. 


무력감과 통제력 상실에의 두려움.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다 해도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고 통제감을 잃게 되는 일은 누구나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이 눈앞에 있지만 움직여 손에 넣을 수 없”고, “고통을 느끼지만 없앨 수 없”는, 타인의 손에 자신의 생을 의탁해야 하는, 유아기의 완벽한 무력감. 


누스바움의 말을 빌리자면 맥스의 고통과 악몽들은 이러한 “초기 고통의 재생산”이나 다름없다. 신체적 소멸과 정체성 소멸. 그가 목도한 죽음들. 상실로 인한 그의 고통과 두려움을, 소설의 막바지에 드러나는 이야기의 반전까지 살펴보고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계급상승에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름을 바꾸고 가족을 등진 딜레탕트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었다.     

  

기억 속 장면들은 지나치게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되는데 일면 자연스럽다. 이제 그는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딜레탕트의 휘황한 껍데기가 벗겨진 채로, “지쳐빠진 늙은 사기꾼의 얼굴”을 하고서, 그가 한때 염오하던 계급 밑바닥의 몰개성한 어린 자신이 ‘신’들을 만났던 그곳에, 아직 어떤 상실도 일어나지 않은 바로 그 바닷가에, 그는 은둔해 있다.   

   

“집중을 하면 우리가 거기 앉아 있는 모습을 아주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정말이지 기억하려는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p151

3. 사랑     


하지만, 딱히 사건이랄 게 없이 단조로이 흘러가는 이 소설의 책장을 계속 넘기게 한 건 상실의 혼란에 빠진 노년의 남자가 아니었다. 첫 성애적 감정과 사랑에 눈뜬 소년이었다. 어떤 사랑은 이제껏 내게 있는 줄 몰랐던 몸의 감각을, 어떤 사랑은 존재의 감각을 일깨운다.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존재를,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어떤 사랑은 존재론적 변환을 도와 새로운 자아를 완성시키고, 가뭇없이 스러지게 한다.      


4. 바다, 존 밴빌      


무엇보다 바다. 바다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고요하고 평화롭다가도 거칠고 사나워지며, 무심하고 무자비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래서 경이로운, 삶의 낱낱을 모두 보여주는 바다. 이야기의 정경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던 바다가 어느새 훌쩍 다가와선 사정없이 나를 잡아끄는 듯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맥스의 허리께 출렁이는 파도를 나 또한 느낄 수 있었고, 물 밑에서 아른거리는 하얗게 질린 내 두 발을, 다가오는 파도에 떠밀리지 않으려 젖은 모래를 움켜쥐는 발가락의 꺾인 마디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바다가 “광폭하면서도 맑은” 내 어린 시절의 바다를 되살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밴빌의 언어가 지닌 힘 덕분일 것이다. 


존 밴빌은 현존 작가 중 가장 아름다운 영어문장을 구사한다는데, 번역을 거쳤음에도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묘사가 어찌나 생동감 넘치고 핍진한지 모든 장면이 눈에 보이듯 선했고, 장면마다 맥스의 감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몰입감은 오랜만이었다. 


생각지 못한 반전들에 얼이 빠져 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전율했다. 인간이 얼마나 아프든 괴롭든, 그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 그 어떤 소멸도 거대한 자연이 아주 잠깐 몸을 뒤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 감정을 고양하지만 상투적인 감상에 젖게 하지 않는데, 그러기엔 지나치게 담담한 어조로 마지막을 고해서였다. 결말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질 않아 첫 장면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라는 첫 문장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고, “누군가 막 내 무덤 위를 걸어갔다. 누군가가.” 단문으로 이뤄진 두 번째 문단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적 감흥만 불러일으키던 문장들이 맥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비의를 품고 있었음을, 이야기가 끝난 뒤에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은 가지를 치고 흩어진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고,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p114




덧. 영화화되었다는 말에 찾아보니, 배우들의 이미지가 싱크로율 200%!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9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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