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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2. 2023

"눈을 뜨면 연극은 시작돼 있을 거예요."

닉 드르나소, <연기수업>


#닉드르나소 #그래픽노블 #프시케의숲 #ActingClass


‘내가 도대체 뭘 읽은 거지,’ 책을 덮자 이런 생각부터 들었던 게 또 언제였더라. 지난번 <사브리나>를 완독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얼얼한 상태로 마지막 페이지를 재차 확인했다. 이렇게 끝난다고? 혼란의 물음표들 속으로 내던져진 채 결국 이야기가 방향을 틀었던 모퉁이들로 되돌아가야 했다.


닉 드르나소의 작품들은... (한숨) 쉽지 않다.


<사브리나>가 현실 공포를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면, <연기수업>은 어떤 공포라고 해야 할까? 내면 어딘가에 있는지도 몰랐던 특정 불안을 불쾌한 방식으로 자극하여 끄집어낸다.


<연기수업> 또한 사브리나처럼 내 예상을 뭉개가며 행로를 바꾼다. 등장인물들이며 이야기 자체도 불편한 구석이 많은데, 이렇게 예측을 어그러뜨리며 제 갈 길 가는 소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식탁 한편에 놓아둔 채 읽을 때마다 미간에 주름 잡고서 몇 날 며칠이고 이 책에 매달렸는데, 그걸 보다 못한 J가 평생을 읽을 거냐고 내게 물었던 날도 있었다. 그래픽 노블을 많이 읽어오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글밥 많은 그래픽 노블은 흔치 않을 성싶다. 딱히 그런 연유로 읽느라 시간이 걸린 건 아니다. 이야기가 주는 긴장도 혹은 밀도 때문에 페이지 터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


드르나소의 인물들은 생김새만으로는 얘가 걘가 쟤가 걘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하며(이 점 또한 독서의 속도를 늦췄던 장애물이며) 표정 또한 아주 단조로운데도 어떤 인물의 표정(그리고 대사 한줄)에 사로잡혀 오래 들여다본 날도 있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받는 ‘연기 수업’은 매 수업이 미국 어딘가에서 실제 진행되고 있을 법한 현실감을 준다. 적어도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다가 (드르나소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을지 궁금한데) 독자를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우리의 임무는 명확하다는 뜻이죠. 뭔가를 믿고, 행복해질 것."


삶의 역할들이 여럿 주어지고 나서부터 어느 정도 연기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를 장착하여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보이는 데 퍽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얼굴들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고 균열이 시작되는 때가 찾아온다. 본연의 나, 진실된 나는 무엇이지, 라는 질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의 제목과 도입부에서 나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일련의 ‘연기수업’은 일종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 될 터이며, 그 끝에 인물들이 도달할 곳은 ‘분열된 자아들의 화해 혹은 조화’일 거라고. 따라서 갈등을 해결하고 자신이 그간 인지했든 못했든 어느 순간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려버린 상처들을 봉합하여 현재의 삶을 건강하게 영유하는, 식상하지만 아름다운 결말을 섣불리 그려보았던 것이다.


드르나소는 어쩐지 이런 힐링류나 자기계발류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것 같았지만, ‘연기수업’이란 말이 내게 주는 실제적 어감이 그러했다.



하지만 연기수업이 진행될수록 상상 세계가 물리적 현실 세계에 조금씩 침투해 들어온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고 뒤틀린 인물들은 되돌아올 수 없는 '경계'를 넘어버리고, 내가 도달할 거라 생각했던 바람직한 현실 어딘가가 아니라 그 너머로 가버린다. (어떻게? 버스를 타고 갑니다...)


이야기의 특정 지점들로 되돌아갔을 때 내가 눈여겨본 이들은 세 부류였다.


1) 가장 빠르게 경계를 넘어버린 두 사람, 엔젤과 데니스.



2) 경계를 넘지 않고 남은 세 사람 로지, 대니엘, 글로리아.



3) 인물들 가운데 애초부터 저 너머에 속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결국 가지 못하고 강제로 이곳에 남겨진 한 사람, 베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복잡한 심경이 들게 하는데, 바로 베스의 대사이다. “저 어디 안 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갔어야 했는데...


왜 어떤 이들은 경계를 넘어섰고, 어떤 이들은 넘지 않았나. 각 인물에 부여된 전사와 특징들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재독하니 처음에 놓쳤던 지점들이 뒤늦게 보여 흥미로웠다.



https://youtu.be/4rkwKEGhcUc



https://brunch.co.kr/@outofisland/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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