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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0. 2023

비 오는 연못에서 헤엄치기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조지손더스 #어크로스 #19세기러시아소설 #단편소설 #읽기 #쓰기


19세기 러시아 소설 애호가에 대한 오랜 선입관이 있다. 선과 이상을 추구하는 윤리적 인간, 불의를 참지 않는 개혁가, 자기 관리와 통제력이 뛰어난 원칙주의자. 기질을 거칠게 분류하자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지 않을까 하는.


나는 이런 유형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에 쉽게 경도되며 이들만이 줄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삶을 얼마나 건강하게 바꿔줄지 알고 있다. 내가 성장하려면 내 삶에 꼭, 어쩌면 가장 필요한 이들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이들 앞에서는 어쩐지 긴장하게 되고 어느 순간 고조된 긴장감(내가 타고난 느슨한 기질로 인해 발생한 긴장감)이 이들에게서 날 멀리 떨어뜨리곤 한다. 필연적으로 벌어진 거리감을 뒤늦게 아쉬워하지만 어쩔 수 없다. 회자정리려니, 운 좋으면 거자필반... 이제는 잊고 살지만, 이 글을 쓰면서 돌이켜 보니 이 사람만큼은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여전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사람도 어려운데 소설이라 쉬울까. 19세기 소설들로는 좀처럼 손이 가질 않는다. (이름이며 이야기며 길기는 또 오죽 기냔 말이지. 활자지옥....) 거기에 인간을 향한 위대한 정신이, 선한 마음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 책들은 책장에 처음 꽂힌 그대로 여전히 각 잡힌 채 도열해 있다. 빳빳하게 낡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부담감을 안겨준다.


언젠가 과제로 돈키호테 완역본을 '꾸역꾸역' 읽어치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선생님이 그러셨다. 돈키호테를 완독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1/3을 읽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그렇다면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들의 대표작만 읽어도 다른 1/3은 거뜬히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의 5할 정도는 인생작?)


그러니 이 책을 발견했을 때, 특히 뒷날개에 적힌, “젊은 작가가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을 읽는 것은 젊은 작곡가가 바흐를 공부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흐라잖나! 이제야말로! 게다가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단편!)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솔직히 망설이긴 했으나 서문을 읽고는 도전해보자 했고, 첫 챕터인 체호프의 단편 '마차에서' 편을 읽은 뒤에는 이 책이 내가 넘(을 의지조차 내)지 못했던 거대한 장벽에 문을 달아주겠구나 확신이 생겼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위대한 20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의 대가 이삭 바벨이 표현한 대로 우리는 이제 곧 “어떤 강철못도 적당한 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 차갑게 인간 심장을 꿰뚫을 수 없다”고 가정하는 영역에서 시간을 좀 보낼 참이다. 우리는 일곱 개의 꼼꼼하게 구축된 세계 축척 모형에 들어설 것인데, 이 모형은 우리 시대는 완전히 지지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가 살펴볼 작가들은 암묵적으로 예술의 목표라고 받아들였던 구체적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목적이란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가? 무엇을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가? 도대체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평화를 느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결국 우리를 그들과 거칠게 떨어뜨려 놓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뻐하며 살겠는가? (알잖나, 그 명랑한 러시아식 커다란 질문들.)" p 15-16


소설, 특히 단편, 그리고 읽고 쓰는 일에 진심인 작가가 이십여년 간 시러큐스 대학 문예창작 수업에서 가르쳐 온 것을 한 권의 책에 꽉꽉 담아 놓았다.


단편이라는 형식의 물리학을,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그리고 고골의 작품으로 체득하게 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고, 이것은 저자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온 문학 수업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의 타겟 독자는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서 ‘성공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이들일 수 있다.


허나 모든 작가는 작가 이전에 독자이듯이, 소설을 잘 쓰려면 잘 읽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제대로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훌륭한 독해 교본이자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부제는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원제는 'A Swim in a Pond in the Rain: In Which Four Russians Give a Master Class on Writing, Reading, and Life'. 번역제목도 원제도 책의 핵심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원제에서 거장들의 가르침이 읽기와 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은 이 책이 단순한 작법서가 아님을 알려준다. 원제 '비 오는 연못에서 헤엄치기'는 체호프의 '구스베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특히 이 단편과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샤'는 저자의 가이드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깊이 있게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러시아 소설은 좀...' 그렇게 별다른 감흥 없이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단편소설은 모든 장면과 문장, 단어조차 목적이 있고, 낭비되지 말아야 함을, 저자는 꼼꼼한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유쾌한 농담도 어찌나 잘 하시는지!


개별작품의 독서경험이 독법과 작법 공부로 끝나지 않고 삶에의 성찰로 이어지곤 했는데, 그게 가장 좋았다. 저자 말마따나 어떤 소설은 “어떤 흠에도 불구하고” 혹은 “흠 때문에” 훌륭하다. 인간도, 그리고 삶도 그러한 것 같다.


이 책은, “여전히 인생을 소설에 바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순한 살 소설가의 열렬한 대답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름답게 끝난 이야기의 특징은 우리가 인물의 삶이 이야기 너머까지 이어진다고 상상하게 된다는 점이다.” 98

“하지만 어떤 이야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으로 보이는 결론이 아니라 이야기를 읽는 과정에서 일어난 독자의 마음속 변화에 있다.” 100


“더 정직해지자. 우리 읽고 쓰는 사람은 읽고 쓰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읽고 쓰면 더 살아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읽고 쓰며,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제로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크며, 나 자신은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마이너스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그러니 완벽하게 정직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진단하듯이 물어보자. 소설이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인가?
자, 그것이 이 러시아 소설들을 읽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쭉 물었던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읽기 전 상태를 읽은 후 상태와 비교했다. 바로 그게 소설이 하는 일이다. 소설은 마음의 상태에 점진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거다. 알다시피, 정말 그렇게 한다. 그 변화는 한정적이지만 진짜다.
그리고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599-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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