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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l 17. 2023

디지털 시대의 재난

돈 드릴로, <침묵>

“자기 휴대폰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 소개 문구에 따르면,돈 드릴로는 


“현대사회의 문화적 상황을 깊숙이 통찰하는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품의 주제는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탐구로 요약될 수 있으며 폭력과 음모, 대중매체와 광고, 죽음과 테러에 대한 집착 등을 다루고 있다"


는데, 사실 내가 그의 소설에서 기대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2. 소설로 현 사회를 통렬하게 탐구하려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소설을 읽었다 해도, 실제 그런 소설의 날카로운 주제의식이 성공적으로 빚어낸 결론에 내가 무사히 도달했다 해도, 그건 도랑치고 가재잡은 격이랄까.

대체로 나는 나를 웃게 하거나 울리거나 긴장시키거나 고양시키거나 (내)현실에 없을 법한 데로 데려가는 소설을 선호해왔다. 정신을 깨우고 현실을 일깨우는 소설의 미덕을 깨달은 건 오래되지 않았다. 주제를 간추려야 하는 책의 한줄 소개, 한문단 핵심 요약에 취약한 건 그래서인가. 주제파악은 어쩐지 하기가 싫고, 쓰기도 전에 생각만으로 이미 지쳐버... 문장을 못 끝내겠...


3. 돈 드릴로의 2020년 신작 <침묵>을 완독했다. 내가 이제껏 그의 소설에서 기분좋게 받아왔던 것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눈물)


4. 그럼에도 완독한 건 경장편 길이의 비교적 짧은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내가 돈 드릴로 님을 너무... 그런데 이분은 어떻게 이름도 Don이시지.


5. 그의 “블랙유머와 아이러니 섞인 언어”를 좋아한다. <화이트 노이즈>는 정말 웃겼지. 하지만 언어가 주는 감각적 고양감. 그의 소설에서는 그게 최고라 여겼고, 그 점에서라면 내게는 그가 최고였다. <제로k>와 <바디 아티스트>를 읽었을 때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6. 그걸 이 책에서 받지 못했다. (다시 눈물)


7.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무엇에 이끌려 갔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제’였다.  저자의 주제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별생각 없이 도랑을 쳤는데 난데없이 가재가 잡혀왔다.


8. 무의미한 대화들이 어떻게 유의미한 주제를 만들어내는지 이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다.


9. 이야기의 대부분을 ‘말’이 차지하고 있다. 인물들의 대화는 서로 순서를 맡아 늘어놓는 독백과 같다. 여기 어디에 ‘침묵’이 있나 싶을 만큼 그들은 쉴새없이 떠든다.

하지만 그들의 입을 빌려 나오는 말들의 속성과 대화의 불통이 역설적으로 언어의 부재를 느끼게 했다. 소통의 멈춤 상태. 그런 점에서 ‘침묵’은 재난으로 인한 단절과 고립으로 새롭게 발생한 게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게 아닐까.

소설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통신망과 전자기기들이 먹통이 되고 세상도 멈춘다. 그렇게 디지털 노이즈가 사라져 발생하는 침묵만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언어의 부재로 발생하는 침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10. 소설의 도입에서 비행기가 추락하기 직전 부부의 대화를 읽다가 얼마 전 J가 우리 부부를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와, 서로 자기 말만 하는데 대화가 되고 있어.

(어, 그게 일곱살짜리 언어 특성이란다....)


11. 표지 속 ‘도심의 난데없는 사슴’이라는 이미지를 출간 직후 보았다면 디스토피아적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필 2023년 봄에 봐버린 탓에 너무 아련아련했다. 이건 다 뉴진스의 Ditto 때문. 애틋한 허밍과 함께 학교 복도 끝에서 사라진 사슴과 소녀의 눈물 고인 사슴 같은 눈망울, 그러다가 종내는 얼룩말 세로까지 떠올리고 말았다. (잘 지내려나...)

원작 소설의 오리지널 표지는 보다 강렬하고 직관적인데, 어쩐지 잡지 광고 사진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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