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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l 16. 2023

"당신이 본 것은 늘 당신과 함께"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책장을 짜야한다. 거실 혹은 베란다벽, 어디든 결단을 내려 짜넣지 않으면 바닥에서 키가 높아지는 책더미를 단골 헌책방으로 들고가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책장의 책을 또다시 하나 뽑아내야 하더라도, 이 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록작 가운데 두 편의 글이 너무 소중하여 내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고 싶었다. 한 편은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내가 이제껏 읽었던 ‘환대’에 관한 글 가운데 가장 좋았다. 글은 아주 짧다. 내용도 특별하지 않다. 오래 안면을 트고 지낸 두 남자가 어느 날 함께 식사했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 그들이 식사를 마친 뒤 서로 인사를 나누는 대목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간 존 버거는 내게 소설가보다는 미술평론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의 소설은 읽어본 적 없고 독서 목록에 넣어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뒷전으로 밀어뒀는데, 이 짧은 이야기가 마음을 너무 흔들어놓아서 다음으로 그의 소설을 읽어볼까 망설이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은, 음, 이 글은... 마음속에 간직해야지. 




내게 존 버거는, 아는 작가이지만 실상은 모르는 작가이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무엇이 좋은지는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작가다.


완독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띄엄띄엄 읽었다. 어떤 문장이나 대목, 한 꼭지의 글에 꽂혀 있다가 책을 덮고 나면 한동안 잊고 지냈고 되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꽂힌 대목이 완독한 한 권의 책에 견줄만한 인상을 주곤 했기에 그만큼의 부채감도 동시에 안겨주던 작가였다.


책태기도 끝났는데, ‘언젠가는’ 하고 미루던 존 버거를 ‘이번에야말로’ 읽어보자 싶었다. 깊이 오래 파고드는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탓에 이 책을 첫번째로 골랐다.


그림과 제목이 내용의 전부인 한 편을 더해 총 29편이 엮인 이 책은 원제가 photocopies다.

스물여섯번째 ‘샤프카를 쓴 여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올가, 1993년 10월 5일 화요일자 프랑스 신문에 난 한 장의 사진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말로 된 이 포토카피를 만든다.” p133


이 대목에서 이 책의 제목과 내용이 지어진 연유를 짐작해보았다.


존 버거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갈무리된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치 글로 복사하듯 선명하게 남겨 놓았다. 인물들은 다양하다. 친구들, 지인의 이야기 혹은 사진 속 인물이기도 하며 여행길에 만난 사람, 거리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누군가다. 유명인사도 몇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이 거의 막바지에 등장하여 독자가 이미 갖고 있을지 모를 그들에 대한 정보가 그가 보여주는 장면 속으로 침투하지 못한다. 이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어떤 것도 사라져 없어지지 않아요.
당신이 본 것은 늘 당신과 함께 있어요.” P62


그는 최선을 다해 ‘보여준다.’ 미술평론가라지만 독자의 감상을 방해할 만한 비평도 주장도 그곳엔 (거의) 없다. 그의 감정과 의견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받은 인상이(간간이 그의 성찰이) 그의 언어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어떤 꼭지들은 그가 그리는 인물로 인해 그의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 같다.) 때때로 소설적 상상력으로 빚어진 이야기들조차 순수하게 장면의 복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남은 장면을 그의 예민한 눈을 통해 생생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런 점이 특히 어떤 글에서는 유독 빛나서 어떤 방해없이 순수하게 그 장면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울컥했다.

그가 ‘보다’라는 행위에 부여한 의미를 아직은 알 수 없다. 적어도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한지는 알겠다. <본다는 것의 의미>, <다른 방식으로 보기> 등을 먼저 읽는다면 이런 짧은 삽화들마저 더욱 깊게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그의 첫 책으로 만나 기쁘다.

마음에 오래 품고 싶은 책, 쏟아지는 양서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시 읽고 싶어지는 글을 만나 기쁘다.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아들아, 힘든 이승에서 우리는 때로 굴욕을 당해야 할 때도 있으니, 그럴 때면 네가 배운 방식대로 그걸 받아들여라. 그런 후엔 손을 깨끗이 씻도록 해라.”” p90


“숫돌을 하나 찾고 있었다. (소박한 기쁨- 꽃을 꺾어 와 병에 꽂는 아침, 잘 드는 칼, 잠에서 깬 후 찬 물로 하는 세수, 사랑하는 이가 보낸 한 통의 편지) 이 점포 저 점포를 기웃거린다. 산뜻한 것은 아무 데도 없다. 모두가 중고품에 먼지를 쓰고 있다. 하나씩의 얘기는 다 가지고 있을 그런 물건들. 어떤 것은 산뜻함을 뛰어 넘는 어떤 자부심도 엿보인다.” 119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는 자신의 의식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만일 눈이 온전하면 네 몸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요, 눈이 온전치 못하면 네 몸은 어둠으로 가득할 것이라. 네 안의 빛이 어두워지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큰 어둠이겠느냐.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었다.” 121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편지에서 ‘자신이 추신을 즐겨 덧붙이는 이유를 설명하길) 손가락 사이에 무언가 남아 있다고 느끼는, 문장을 이루기를 원하는 낱말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느끼는, 영혼의 주머니를 완전히 다 비우지 않았다고 느끼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대체 어떤 추신이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 끝없는 악몽을, 그 다함 없는 꿈을...” 151


https://brunch.co.kr/@outofisland/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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