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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l 15. 2023

제주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

<나는 제주 건축가다: 제주 현상과 제주 건축의 미래>

엄마는 고향집이 그리워 울적한 날에는 탑동 해변가를 하염없이 거닐었다고 했다. 그 말에 내심 놀랐는데, 엄마가 그런 류의 감정을 고백한 게 처음이었고, 탑동 광장이 한때 몽돌해변이었음을 그때 알았던 것이다. 


바다를 메우기 이전의 먹돌새기를 어린 내가 경험한 적이 있었을까. 적어도 그날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식들을 모두 집에 남겨둔 채 홀로 바닷가를 걸었다 했으니까. 그런 엄마의 심정을 이젠 너무 잘 알지. 고향이 그리울 때,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으면, (어쩌면 그리움과 날씨의 선후관계가 바뀌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동네 숲길을 걷는다. 그런 날에는 내게는 퍽 익숙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 환청 같은 바람 소리가 내 마음을 달랜다. 바다가 머리 위에서 거칠게 출렁이는 것이다. 


어쨌든, 매립된 이후 현재 길쭉하게 뻗은 광장의 탑동만이 내게 남아 있는 전부다.      




어떤 지역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그곳의 건축가가 쓴 책을 읽는 것도 깊은 통찰을 얻는 길이다. 고유한 지역성을 건축물에 담으려 고군분투하는 건축가의 이야기라면. 

이 책을 만나고서 그걸 깨달았다. 김형훈 기자가 19인의 제주 건축가와 나눈 인터뷰집을 읽었다. <나는 제주건축가다>. 부제는 ‘제주 현상과 제주 건축의 미래’.       



제주 건축가들 사이에서 이른바 6세대로 구분되는, 70년대생의 제주 토박이 건축가들.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어린 시절 옛 제주의 기억을 생생히 지녔기에 제주의 지역성, 풍토,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을뿐더러 ‘보존’과 ‘개발’ 사이의 균형 잡기, 건축이 지녀야 하는 공공의 가치 추구, 미래 제주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를 위한 현실적 방안 모색 등등 실천적 고민의 최전방에 있다는 것이었다. 

제주를 멀리서 새로 배우는 듯 했고, 내가 가진 협소한 제주 지도가 넓어지는 것 같았다. 여백으로 남겨진 지역이 선명한 형태와 색을 부여받은데다가 고향에 대한 애착이 다른 의미로 깊어졌다. 독서가 감사라는 형태의 감상으로 끝나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다.


모든 인터뷰가 인상적이고 제주를 달리 보게 한다. 공통적인 메시지라면, ‘제주만의 독특한 지형을 살리는 건축’ ‘경관의 사유화를 경계하는 건축’ ‘건축물이 경관 공해가 아니라 자연경관의 일부가 되어 오래가는 건축’ ‘그곳에 살 이를 고려하는 건축’, 그리고 ‘장소에 대한 기억을 남기는 건축,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등의 가치였다. 

건축가들이 특히 애착을 갖는 제주 곳곳에 대한 기억으로 인터뷰가 시작되는 점도, 자신들에게 영감 내지 영향을 준 책을 한 권씩 소개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소개해준 장소와 책 몇몇은 시간을 두고 살펴보고 싶어졌다. 내가 나고 자란 구도심도 느긋하게 둘러봐야겠다고, 바다나 오름이 아니라 동네 골목과 오래된 마을들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개발이 더딘 곳이 아니라 아직 옛 기억을 간직한 곳으로 보일 테지.  

     

     

에스오디에이 건축사사무소, 백승헌

설계 아이디어: “어릴 때 경험이다. ...제주도의 집은 재밌다. 집은 도로보다 낮았고, 마당도 평평한 곳은 없으며 동산이 있었다. 어릴 때는 무척 재밌는 공간이었다. 동산에 오르면 초가지붕이 다 보였다. 그래서인지 입체공간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단차를 살려서 집을 지으려고 한다.” 49


홍건축, 홍광택 

자연의 활용: “건축가는 결국은 개발을 하는 사람이다. 자연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래서 건축물이 자리매김했을 때의 배치가 중요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자연치유적 현상이 일어나서 그 건축물이 자연경관을 이뤄낼 수 있는 건축물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67
삶의 건축: “먹고사는 경제적 부분도 중요하지만 따뜻한 건축을 해야 한다. ...의뢰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제주에만 너무 어울리는 디자인, 건축가가 추구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디자인만 고수하면 막상 그 집에 들어가서 살 건축주는 어떻게 생각할까.” 67


티에스에이건축, 김태성

제주의 풍경: ‘선인장 마을’ 월령리. “선인장이 제주의 돌담과 만나서 마을의 풍경을 이룬다. 선인장은 제주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해류를 따라 씨앗이 넘어와 제주의 토착돌과 만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제주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풍경의 과정이 현재 제주의 상황과 묘하게 교차되며 ‘제주의 풍경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73


에이루트건축, 이창규

지역성: “예전 제주집은 풍광을 독점하여 짓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풍경을 공유하고 조화로운 집과 마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요즘은 자신의 집에서 자연경관을 최대한 많이 보고 싶어 한다. 경관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제주를 해석하거나 제주에 내려와서 사는 분들의 다양한 욕구와 삶이 있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주변과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어떻게 제주지역 풍토에 어울리게 할 것이냐에 있다.” 98
도시재생: “제주시 구도심은 천년이 넘은 곳이다. ...하지만 그 흔적이 없어서 천년이 넘은 도시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은 몇 년에 걸쳐서 각 지점마다 경관을 찍는 등 기록을 하고 있다. 기록화가 필요하다.” 102 


마음건축, 조진희

지역성: “제주에는 끝이 있다. 땅의 끝이 있다. 끝이 있어 좋다. ...짧은 시간 안에 땅의 끝, 바다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라산을 볼 수 있다. 제주도의 지도를 보거나 기억해낼 수 있다면, 자신이 있는 위치와 한라산과의 거리 관계를 상상하여 제주도의 전체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땅의 끝을 땅 위에 서서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이 제주도 지역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섬인데 작지도 않고, 아주 대단히 크지도 않은 섬, 그 규모에서 흘러온 삶과 문화가 제주인의 생활에 녹아 있을 것이다.” 109


도시건축연구소 문랩, 문영하

도시의 장소에 대한 기억: “그게 중첩되고 남겨지고 보여야 도시가 재미있고, 이야깃거리를 지닌 도시가 된다고 하잖는가.” 164     


건축사사무소 오, 오정헌

제주다움: ‘될 수 있는 대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며 살아간다’는 느낌. “제주 사람들은 있는 것을 잘 활용했고, 환경이 거칠면 거친 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에게 제주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138
“건축을 할 때 건물은 여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주도는 건물 자체가 여백이 되는 곳이다. 서울은 건물이 여백이 되어주지 않는다. 꽉 막혀 있다. 제주도는 사람도 여백이 있으며, 건물도 여백을 만들어준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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